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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vs시진핑]①정치 DNA…롤모델을 분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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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의 롤모델 기시 노부스케, 그는 누구인가?


# 1960년 여름, 다섯 살의 아베 신조(安倍晋三)는 외할아버지의 무릎 위에서 한창 재롱을 부리며 놀고 있었다. 주변은 온통 소란스러웠다. 수많은 시위대가 언제라도 쳐들어올 듯이 집을 둘러싼 채 '안보(미일 안보조약 개정) 반대'를 외치고 있었다. 어린 아베는 담장을 넘어 들려오는 시위대의 구호가 재미있는 듯 "안보 반대"를 따라 외치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은 깜짝 놀라 시위대 흉내를 못 내게 막으려 했지만, 기시는 아베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시위대의 주장이 왜 잘못됐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외할아버지의 말이 끝나자 아베 신조는 이제는 반대로 "안보 찬성"을 외쳤다.

아베 총리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어린 시절 외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이다. 아베를 향해 인자한 미소를 보였던 인물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1896~1987) 당시 일본 총리였다. 아베는 2006년 쓴 '아름다운 나라로'라는 책에서 "외할아버지는 일본의 미래만을 생각하는 진정한 정치인이었다"고 평가했다. 아베의 아버지 역시 정치인으로 외무상까지 올랐던 인물이지만 아베는 정치인으로서의 가장 닮고 싶은 롤모델로 외할아버지인 기시를 꼽았다. 기시의 꿈을 아베가 잇고 있는 것이다.



[아베vs시진핑]①정치 DNA…롤모델을 분석하다 기시 노부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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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관료 출신인 외조부= 기시는 1898년 일본 야마구치현(山口縣)에서 태어났다. 야마구치현은 근대 일본을 탄생시킨 메이지유신의 주체세력이었던 옛 조슈번(長州藩)의 현재 지명이다. 조슈번 출신 가운데 유명한 인물로는 일본 첫 총리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일본 육군 원수이자 총리인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등이 있다. 야마구치현은 역대 일본 총리 57명 가운데 8명의 총리를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조슈번 출신이 근대 일본 정계와 육군을 주름잡았다는 점에서 기시는 태생적으로 일본 사회의 주류였다고 볼 수 있다.


기시는 원래 사토(佐藤)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름 또한 사토 노부스케였지만 기시가 어렸을 때 친척집안인 기시 가문의 양자로 입양됨에 따라 기시 성(姓)을 쓰게 됐다. 이 때문에 훗날 일본 총리에 올라 노벨 평화상 등을 수상한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는 기시의 친동생임에도 불구하고 성이 달랐다. 아베의 친동생 기시 노부오(岸信夫) 외무차관도 어렸을 때 기시 가문으로 입양돼 아베와 다른 성을 쓰고 있다.


몸이 약했던 기시는 군인의 길 대신 관료의 길을 선택했다. 1917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한 기시는 1920년 수석으로 졸업한 뒤 농상무성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능력있던 관료였던 기시는 1930년 독일에 파견돼 산업합리화운동 등을 연구하고 돌아왔다. 대공황의 여파로 일본 경제가 타격을 받자 그는 자신이 연구한 산업합리화정책을 주도적으로 정책에 반영했다. 그는 국민경제를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서는 민간자본에 대한 관리와 통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기시는 만주사변 이후 탄생한 일본의 위성국 '만주국'의 산업정책을 총괄하기 위해 만주로 건너간다.


기시는 일본의 괴뢰정권인 만주국의 산업부 차장(차관)과 총무청 차장을 겸직하며 만주국 산업정책을 실질적으로 담당했다. 당시 만주국은 만주인이 명목 뿐인 장관을 맡고 실질적으로는 일본인 차관들이 주요 문제를 모두 결정했다. 사실상 만주 전체의 산업정책을 기시가 총괄한 것이다. 그는 만주에 주둔한 관동군과 함께 만주국의 생산력 확충을 위한 만주국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생산력 확충에 나섰다. 기시는 민간 자본가의 자본을 만주국으로 들어오게 한 뒤 이들 기업이 독점적 특수회사를 세워 특수ㆍ준특수회사 등 생산회사를 만드는 방식의 산업정책을 펼쳤다. 전후 일본의 경제개발을 이끈 관료 주도형 경제개발 정책은 만주에서 시범적으로 실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만주국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둔 기시는 상공성 차관으로 임명돼 일본에 복귀한다. 1942년 기시는 현직 상공상의 신분으로 총선거에 출마해 최고 득표를 얻으며 당선돼 정치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상공성은 군수성으로 이름이 바뀐다. 그는 군수성 차관이 되어 총리와 군수상을 겸직하고 있는 도죠 히데키(東條英機)를 도와 전시 경제를 운영했다.


[아베vs시진핑]①정치 DNA…롤모델을 분석하다


◆'55년 체제'의 주역= 전쟁 패배로 일본이 미군의 점령을 받게 되자 기시는 1급 전범으로 기소돼 스가모 형무소에 수감됐다. 1948년 도죠 히데키 등 A급 7명이 처형됐지만 그는 전범으로 처벌받지 않고 3년만에 출소했다.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을 때 각료로 전쟁 결정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니라 사이판 함락 직후 도죠 내각에 맞선 경험 등이 그의 생명을 구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관료로서의 재능 덕분이었다. 미국은 소련과의 냉전을 벌이게 되자 일본을 대소련 방파제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서는 기시와 같은 능력있는 관료가 필요했던 것이다.


놀랍게도 기시는 이같은 사실을 수년 전에 감옥에서 예측했다. 그의 옥중일기에 따르면 기시는 석방 2년 전인 1946년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악화될 경우 일본에 기회가 생길 것이고, 자신도 교수형을 당하지 않고 걸어서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기시는 그러면서 '반공 친미' 노선을 분명히 했다. 그가 통찰력 있는 정치인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기시는 출소 뒤에 곧바로 국가 경영에 뛰어들지는 못했다. 전범의 족쇄가 채워져 공직에서 추방됐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인의 삶을 살지 못하게 되자 기업인으로 활약했다. 연합국의 일본 점령이 끝난 1952년, 공직추방령이 해제되자 정치 일선으로 복귀했다. 그는 '일본재건연맹'이라는 정당을 창당해 선거에 뛰어들었으나 참패를 거뒀다. 선거 패배 뒤 독일을 방문한 기시는 같은 전범 국가인데도 독일의 경우에는 재무장이 허락됐을 뿐 아니라 국제사회에도 신속하게 복귀하는 것을 보면서 일본 정치권이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귀국 후 그는 보수정당간의 합당논의를 시작했다.


그는 정당들 간의 복잡한 이합집산의 과정을 거쳐 자유당과 민주당을 합한 새로운 보수신당 자유민주당(자민당)을 만들었다. 온건 보수주의부터 극우를 망라한 자민당은 이후 일본의 집권 여당으로 군림하며 일본 경제의 부흥을 이끌었다. 1957년 기시 노부스케는 총리에 올랐다. 1급 전범이 일본 정계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하는 순간이었다. 기시가 정치인으로서 급성장한 이 시기는 '55년 체제'가 만들어진 때다. 1955년 이후 여당인 자유민주당과 야당인 일본사회당의 양대 정당 구조가 형성된 체제를 말한다.


◆쇼와의 요괴= 일본의 전후 질서 체제의 상당부분은 기시에 의해 완성됐다. 그가 정치적 운명을 걸면서까지 통과시켰던 '미일 안보조약' 덕분에 일본은 불평등한 미일 안보조약을 수평적인 조약으로 바꿀 수 있었다. 아울러 미국의 군사적 보호를 분명히 한 덕분에 일본은 안보 부담을 던 채 경제에 매진할 수 있었다.


기시는 총리가 된 후 경제는 관료들에게 맡기고, 본인은 외교ㆍ치안에 몰두했다. 패전 후 일본 총리로는 처음으로 동남아를 두 차례 방문하며 아시아 중시 노선을 펼쳤다. 이 때 아시아를 원조하기 위해 창립한 것이 아시아개발기금이다. 기금을 통해 기시와 동남아와 관계도 깊어졌다.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타이완의 장제스와의 친분도 이 때부터다.


기시의 활약으로 만들어진 자민당 역시 안정적인 정치질서를 구축하는 밑바탕 구실을 하며 일본의 전후재건과 고도성장을 이끌었다. 그는 1960년 미일 안보조약의 국회 비준을 강행하면서 대규모 군중시위를 불러일으키며 비난을 받은 채 총리직을 물러났다. 미일 안보조약은 일본의 독자적인 외교권을 되찾는 동시에 미국, 한국 등과 더불어 동북아시아 냉전에 일부 가담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막후에서 일본 정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쇼와의 요괴'로 불렸다. 쇼와시대는 쇼와 일왕(日王)이 통치한 1926년 12월25일부터 1989년 1월7일까지를 가리킨다.


기시가 일본 경제에 미친 영향도 컸다. 시장경제를 용인하면서도 계획적인 통제를 통해 정부주도형 경제성장을 도모하는 기시의 모델은 일본 고도경제성장의 토대가 됐다. 강상중 도쿄대 교수는 "정부주도형 성장모델이 된 '일본주식회사'와 55년 체제의 창업은 거의 기시에 의해서 이뤄졌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기시가 궁극적으로 추진하기를 원했던 개헌은 그의 생전에 이루지 못했다. 전후 질서체계를 깨려는 목표는 그의 외손자 아베 신조에게로 이어졌다.


시진핑의 롤모델 시중쉰, 그는 누구인가?


[아베vs시진핑]①정치 DNA…롤모델을 분석하다 시중쉰


1935년 10월, 중국공산당 홍군이 1만5000km의 대장정 끝에 도착한 곳은 산시성(山西省) 북부 산베이(陝北) 지역이었다. 10만명의 병력으로 시작한 일행은 이제 고작 8000명의 지친 병사만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국민당군의 봉쇄망을 뚫고 산과 강을 건너온 마오쩌둥(毛澤東)과 홍군. 이들을 맞아 중국 공산혁명의 최후의 근거지를 제공했던 이는 22살의 시중쉰(習仲勳)과 휘하 부대원 5000명이었다.


중국 공산당사는 당시 두 사람의 대화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오쩌둥 "일부 동지들은 산베이가 중국공산당 지도부를 구했다는 말을 하더군요."
-시중쉰 "그 말은 저희가 드리고 싶습니다. 마오 주석과 당 중앙이 산베이에 오지 않았다면 산베이 근거지는 국민당군의 포위에 넘어갔을지 모릅니다."
중국 공산당 1인자인 마오쩌둥이 에둘러 감사하다는 말을 건낸 이는 훗날 중국 국가주석에 오르는 시진핑(習近平)의 아버지 시중쉰이었다.


◆13살에 혁명에 뛰어든 실용주의자= 지방에서 활약하던 시중쉰은 1952년 공산당 중앙선전부 부장 겸 정무원 문화교육위원회 부주임에 임명됐다. 그의 나의 39살이었다. 공산당이 선전 업무를 중시 여기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발탁은 장관급 이상의 영전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시중쉰의 중앙 정치권 진출은 단순한 발탁으로만 볼 수는 없었다. 마오쩌둥은 변방의 실력자들이 독자세력화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해 중앙의 요직으로 발탁하는 방식으로 견제에 나섰는데, 시중쉰 역시 그 대상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베이징에 온 지 1년 뒤 시중쉰은 아들을 낳았다. 새로 태어난 아들이 베이징에서 태어났다고 해 이름에 베이징의 옛이름 베이핑(北平)의 핑자를 넣어 시진핑이라고 지었다.


시중쉰이 젊은 나이에 높은 직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이력 덕분이다. 그는 일제의 침략에 무력하게 당하고 있던 중국의 현실과 무능과 부패에 찌든 정부에 분노해 13살의 나이에 혁명에 뛰어들었다. 15살에는 학생운동에 참여 했다는 이유로 수감되기도 했다. 옥중에서 공산당 당원이 된 그는 훗날 중국 혁명 영웅으로 불렸던 류즈단(劉志丹)을 만난 뒤 공산혁명가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불과 21살의 나이에 산시성과 간쑤성(甘肅省) 22현을 통제하던 산간변구(陝甘邊區) 소비에트 정부 주석에 올랐던 시중쉰은 중국공산당 시베이지구(西北)의 3번째 권력자가 됐다. 그의 상급자는 류즈단과 가오강(高崗) 둘뿐이었다. 시중쉰의 시베이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를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사고의 소유자'라고 평했다. 공산당 특유의 극좌 바람이 불 때마다 그는 실용주의를 내세우며 합리적인 길을 모색한 인물이라는 설명이다.


◆소설책 한 권에 몰락= 1959년 시중쉰은 한 단계 더 승진해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비서장 겸 국무원 부총리를 맡았다. 승승장구하던 시중쉰의 삶은 1962년 '류즈단 사건'을 겪으며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류즈단 사건은 한 편의 소설에서 시작됐다. 시중쉰의 옛 상사 류즈단의 제수인 리젠퉁이 류즈단의 삶을 소설로 써서 시중쉰에게 가져왔다. 시중쉰은 함께 싸웠던 혁명동지들이 등장하는 이 책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책이 출간될 수 있는 방안을 찾았다. 하지만 이 소설의 등장인물 가운데에는 시중쉰의 또 다른 상사 가오강을 연상시키는 인물도 있었는데 이 부분이 화근이었다. 가오강은 시중쉰과 함께 지방에서 활약하다 중앙으로 발탁됐지만 정권을 탈취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자살을 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중국 정보기관에서는 시중쉰이 소설을 이용해 가오강의 명예를 회복시키려 했다는 혐의를 적용했다. 이후 시중쉰은 마오쩌둥에 의해 공개적으로 비판당한 뒤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고 16년간의 구금, 감호 생활을 살아야 했다.


류즈단 사건의 이면에는 중국 정치지형의 복잡한 갈등이 감춰져 있었다.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정치적으로 위기를 맞았던 마오쩌둥은 이 사건을 계기로 당내 주도권을 회복하는 계기로 삼았기 때문이다. 반면 감옥, 지방 공장 생활을 겪어야 했던 시중쉰은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난 뒤에야 베이징에 돌아올 수 있었다. 시중쉰의 몰락은 남부러울 것 없었던 시진핑의 어린시절을 참혹하게 바꿨다.


[아베vs시진핑]①정치 DNA…롤모델을 분석하다

◆개혁개방의 선두주자= 고난의 시간을 보낸 뒤 시중쉰은 중국 개혁개방의 선두주자로 부활했다. 가난한 중국 서민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덕분인지 그의 개혁개방 의지는 확고부동했다.


1978년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으로 정계에 복귀한 시중쉰은 광둥성(廣東省)의 당서기를 맡게 된다. 그는 지역민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경제 자유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시장경제에 회의적인 중앙 정치인들을 설득했다. 시중쉰은 당시 중국 최고실력자 덩사오핑(鄧小平)에게 광둥의 몇몇 지역을 시범적으로 외자를 유치할 수 있는 경제특구를 만들자고 제안해 승락을 얻어냈다. 1980년 8월 전인대에서 선전, 주하이, 산터우, 샤먼 경제특구 설치안으로 통과됐다. 이후 광둥성은 중국 경제 성장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광둥성에서 개혁개방의 틀을 다진 시중쉰은 1981년 중앙정치에 복귀한다. 그는 중국공산당 중앙서기처 서기에 선출돼 후야오방(胡耀邦) 중국공산당 총서기를 보좌하는 역할을 맡았다. 덩샤오핑이 후계자로 점찍었던 후야오방은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끌었던 인물로 경제 분야의 개혁개방뿐 아니라 정치개혁 문제에 있어서도 전향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는 다른 공산당 지도자들과 달리 중국공산당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서는 정치개혁이 필요하다는 점을 주장했다. 이 같은 그의 정치적 소신은 덩샤오핑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학생들의 시위 열풍에 이어 후야오방이 혁명 1세대 원로들의 정계 은퇴를 촉구하고 나서자 두 사람의 갈등은 수습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급기야 덩샤오핑은 후야오방을 공산당 총서기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후야오방의 정책을 지지했던 시중쉰은 후야오방이 권력을 잃는 와중에도 끝까지 그를 지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시중쉰 역시 중앙정치에서 점차 밀려나게 된다.


◆시중쉰의 유산= 시중쉰은 시진핑에게 어떤 유산을 남겼을까. '중국 공산혁명 원로의 아들'이라는 점만으로도 시진핑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치적 자산이 됐다. 태자당이라는 인적 네트워크에 시진핑이 낄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 시중쉰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시중쉰은 1988년 공직에서 은퇴한 뒤 광둥성 선전에서 병든 몸을 치료했다. 건강상의 이유로 중앙 정치와 거리를 뒀던 그는 1999년 건국 50주년 기념식에 참석을 허락해달라고 공산당에 요청했다. 그의 건강을 우려한 공산당 지도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몸을 이끌고 베이징행에 나섰던 그는 12일간의 체류 기간 동안 당시 중국공산당 최고 실력자였던 장쩌민(江澤民) 국가주석, 차기 권력자인 후진타오(胡錦濤), 원자바오(溫家寶)를 만났다. 이 자리에 시중쉰은 아들 시진핑을 참석하도록 했다. 아들이 중국 최고지도부를 만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이 밖에 시진핑이 아버지로부터 배운 가르침 가운데는 청렴한 생활태도를 빼놓을 수 없다. 시중쉰은 시진핑이 어렸을 적에 누나가 신던 꽃신을 물려받아 신게 할 정도로 검소한 삶을 강조했다. 이 덕분인지 시진핑은 청렴한 관료의 삶을 살았다. 덕분에 고도성장기의 중국 연안지역에서 다년간 지방관리를 하면서도 비리 문제로 엮이지 않을 수 있었다.


세련된 정치감각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 시진핑은 지방 관료시절부터 당 중앙의 정책과 완전히 일치하는 정책기조를 보였다. 성장을 강조하는 시대는 성장에, 조화를 강조하는 시대에는 조화에 초점을 맞추는 식이었다. 이 같은 유연한 정치감각은 온갖 정치적 풍파를 겪은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자연스럽게 체득된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정치감각은 상하이방, 공청단, 태자당 모두 시진핑을 반대하지 않토록 만들어 그를 중국 최고 지도자로 이끌었다.




나주석 기자 gongga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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