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마다 수식어를 붙인다면 가을이 단연 화려하고 다채롭지 않을까. '가을을 타는' 남자들의 바바리코트 자락이 고즈넉해보이는 '남자의 계절'이자, 선선한 날씨에 영혼을 살찌우기 좋은 '독서의 계절'이고, 나뭇잎 흔드는 바람 소리에 괜스레 삶을 고뇌하게 되는 '사색의 계절'이며,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찌는 '천고마비의 계절'인 것이다. 솔로인줄 알았던 직장 동료가 회사 근처에서 누군가의 손을 잡고 데이트하는 것을 목도하는 '연애의 계절'도 바로 이 호젓한 가을이다. 하나 더 보태면 '자전거의 계절'도 있다.
왕년에 자전거 안 타본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자전거 인구 1000만 시대'의 자전거는 막걸리통이나 쌀가마니 따위를 실어나르는 운송수단이 아니다. 건강을 챙기고 여가시간을 윤택하게 빛내는 삶의 동력인 것이다.
그러니 복장이며 장비에 아낌없이 투자한다. '꿈의 소재' 티타늄 자전거는 가격이 2000만~3000만원으로 웬만한 자동차가 오메 기죽어 할 정도다. 복장만 보면 올림픽 국가대표요, 장비만 따지면 세계 선수권 대회에 출전할 기세다. 그런 무리들이 가을 바람에 취해 곳곳에서 페달을 밟는 모습을 시기 반, 질투 반 바라보다보면 불현듯 웃픈(웃기면서 슬픈) 사연 하나가 떠오른다.
2년 전 이맘때 일이다. 대기업 임원 A는 자전거에 꽂혀 500만원을 지르면서 아내에게는 150만원에 샀다고 거짓말을 했다. 150만원이면 애 학원비가 몇 달치니 어쩌니 하는 아내의 구박을 꾹 참으며 드디어 한강으로 첫 시승을 나선 주말.
아까워 오래 타지도 못하고 벤치에 앉아 자신의 애마를 감상하는데 30대 후반의 사방사방한 여인이 다가와 관심을 보이는 게 아닌가. 브랜드가 뭐네, 가격은 얼마네 둘이 정답게 말을 섞다가 "한번 타보면 안되겠냐"는 여인의 부탁을 차마 거절하지 못한 A. 여인은 조심스레 시승을 하는가 싶더니 A를 남겨두고 앞으로 달리고 달리고 계속 달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결국 저만치 달아난 여인. 어~어~ 하다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A는 여인이 타고온 구닥다리 자전거로 추격에 나섰지만 스포츠카를 어찌 똥차가 따라잡겠는가.
작심하고 다가온 여인이 괘씸하기도 하고 넋놓고 당한 자신이 어리석기도 하고. 새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가 고물 자전거를 끌고 돌아온 사연을 아내에게는 또 어찌 설명했는지. 이후 얼마간 도둑을 잡겠다며 주말마다 한강에 나갔다는 A는 지금도 가을이면 시름시름 입맛을 잃는다. 그런 A에게 가을은 '상처의 계절'인 것이다.
이정일 산업2부장 jaylee@asiae.co.kr<후소(後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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