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양낙규 기자]음악 속에는 신비한 약효가 있다. 때로는 숙연하게, 때로는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군가도 마찬가지다. 전쟁터에서는 승리를 위한 발걸음을 재촉하게 해주고 지친 병사들에게는 시름을 날려주기도 한다. 각 나라와 각 군에서 특색있는 군가를 만드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한국군의 근현대적 군가는 1894년 동학혁명 때부터 시작됐다. 찬송가의 음을 이용한 애국창가, 항일투쟁가, 독립군가, 광복군가에는 목숨을 걸고 전장에 나선 군인들의 결연한 의지를 담아냈다.
각 군을 대표하는 군가는 1951년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최달희 작사ㆍ김동진 작곡의 '육군가', 김찬호 작사ㆍ이교숙 작곡의 '해군가', 최용덕 작사ㆍ김성태 작곡의 '공군가', 신영철 작사ㆍ김형래ㆍ이병걸 작곡의 '나가자 해병대'가 그해 만들어졌다. 신태영 전 국방장관은 다음해인 1952년에 군가제정위원회를 만들어 24곡의 군가를 정식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군가의 가사를 듣다 보면 사연이 담긴 경우가 많다. '행군의 아침'이 대표적이다. 이 노래가사는 6ㆍ25전쟁 당시 미군 심리작전관으로 근무했던 작사자 김영삼씨가 부대에 복귀하기 위해 탄 열차 속에서 눈부시게 비치는 새벽 햇살을 보고 작곡했다. 당시 학생은 물론 일반인들에게까지 애창됐던 군가이기도 하다.
1950년대 대표적인 군가를 손꼽으라면 '휘날리는 태극기'를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의 서울 신라호텔은 1949년에만 해도 미군이 주둔했던 자리다. 하지만 미군이 철수하면서 육군 군악학교가 들어서게 된다. 개교 첫날 행정과장으로 있던 정동주씨는 높은 국기게양대에서 휘날리던 태극기를 바라보며 뿌듯함에 빠진다. 이 감정을 담아 만든 노래가 바로 '휘날리는 태극기'다.
이 노래가 유명세를 탄 것은 그해 육ㆍ해ㆍ공군 군악연주회에서다. 당시 서울 스카라 극장(현재 아시아경제신문 본사)에서 열린 군악연주회 때 김희조씨의 편곡으로 처음 연주된 후 불리기 시작했다. '휘날리는 태극기'는 몇 곡의 군가가 없던 당시 근대적 의미의 군가로 처음 나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육군은 이 노래를 1957년에 정식 군가로 제정했다.
장병들의 울분을 달래주기 위한 군가도 있다. '보병의 노래'다. 국군은 1950년 9월15일에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북진에 북진을 거듭했다. 압록강 물로 통일의 갈증을 풀었던 군은 통일이 당장 눈 앞에 놓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중공군의 개입으로 또 다시 후퇴의 길을 선택해야 했다. 한 많은 1ㆍ4후퇴였다. 당시 육군본부 정훈감실은 울분에 차 있는 장병들을 달래주기 위해 피난 중이던 김요섭 시인과 권태호 작곡가에게 군가를 부탁했다. 이 노래가 '보병의 노래'다.
참모총장이 직접 작사한 군가도 있다. 제2대 공군참모총장 최용덕 장군은 6ㆍ25전쟁 때 많이 불렸던 '공군가', '비행행진곡', '우리 공군 아저씨'를 작곡한 장본인이다. 최 장군은 한국 가곡의 아버지라 불리는 작곡가 요석(樂石) 김성태(1910~2012) 선생과 함께 곡을 만들었다. 이 곡은 공군 군가의 효시로, 이후 공군인들의 삶을 다룬 군가들이 비로소 제작되기 시작했다.
공군가에는 6ㆍ25전쟁 때 참전한 외국군 참전용사도 등장한다. 한국군은 6ㆍ25전쟁 때만 해도 전투기가 한 대도 없었다. 이에 미 공군에서는 바우트 원(Bout One)이라는 작전명 아래 10기의 F-51D 무스탕과 조종사 훈련관들을 한국에 파견했다.
당시 대대장이었던 헤스 대령의 전용기에는 '신념의 조인(信念의 鳥人)'이라고 표기돼 있었다. 헤스 대령의 자서전에 따르면 이 문구는 그의 좌우명 '신념으로 하늘을 난다(By faith, I fly)'를 번역해 옮겨 적은 것이라고 한다. 헤스 대령의 신념은 이후 1982년 강용구 작사ㆍ윤정모 작곡의 '신념의 조인'이란 동명의 군가와 1975년 발표된 최문화 작사 ㆍ작곡의 '필승 공군'이라는 군가에서도 등장한다.
양낙규 기자 if@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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