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나석윤 기자]한국 야구의 대표 '안방마님' 박경완(42·사진)이 오는 5일 인천 문학구장에서 열리는 한화와의 경기 뒤 공식은퇴 및 영구결번식을 갖고 23년 선수생활을 정리한다. 영구결번식은 2000년 SK 구단이 창단된 이래 최초로 열리는 행사다. 이제 등번호 26번은 'SK의 전설'로 남는다.
지난해 10월 22일 현역은퇴를 선언하면서 SK 퓨처스 감독에 선임된 박경완. 그는 "은퇴식 당일이 돼야 실감이 나지 않을까 싶다"며 "지금은 퓨처스 감독으로 해야 할 일들이 많아 (은퇴식) 신경을 못 쓰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고참급 선수가 후배들에 조언을 해주는 것과 지도자의 한 마디는 또 다르다. 큰 그림을 그려야 하니 어려운 점도 많다"고 했다.
선수로서 유니폼을 입은 시간 동안 강산이 두 번 넘게 변했다.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박 감독은 주저 없이 '우승'의 순간을 꼽았다. 현역시절 다섯 차례 우승반지를 꼈다. 현대 시절 두 번(1998년·2000년), SK에서 세 번(2007년·2008년·2010년) 우승을 맛봤다.
가장 짜릿했던 우승은 2007년 두산과의 한국시리즈라고. 두 경기를 내준 뒤 내리 네 경기를 따내며 역전드라마를 썼다. 박 감독은 "SK 창단 뒤 첫 우승이었는데 말 그대로 기적 같은 우승이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선수로서 최고 활약을 한 2000년의 기억도 여전하다. 쌍방울에서 현대로 이적하고 맞은 세 번째 시즌에서 130경기에 출전해 타율 0.282에 40홈런 95타점을 기록했다. 홈런왕과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 골든글러브를 동시에 거머쥐었다.
박 감독은 "뭘 해도 다 될 것 같을 정도로 몸 상태와 컨디션이 좋았다"며 "그 이상의 성적을 내지 못한 게 아쉬울 뿐"이라고 했다. 더구나 2000년 5월 19일 한화와의 대전 원정경기에서는 한국 프로야구 최초로 '4연타석 홈런'이라는 대기록도 세웠다.
물론 혹독한 훈련과 남모를 눈물도 있었다. 1990년 고교 졸업 뒤 이듬해 쌍방울에 입단했다. 당시 신분은 연봉 600만원의 연습생. 출전기회도 적었다. 데뷔 첫 해 10경기를 포함해 1992년과 1993년에도 각각 31경기, 26경기 출전에 그쳤다.
대신 당시 배터리코치였던 조범현 현 kt 감독에게 일대일 훈련을 받았다. 블로킹과 송구연습을 하루 평균 700개씩 했을 정도로 고된 훈련이었다. 그는 "그 때로 돌아가라면 못 갈 것 같다"며 "말도 못할 정도로 힘들었고 혼자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 역시 지도자로서 선수들에 그런 훈련을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
최고의 포수가 되기 위한 요건은 순발력이다. 신체적인 순발력은 물론 경기 중 순간에 대처하는 두뇌회전이 빨라야 한다는 것이다. 포수는 단순히 투수의 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야수나 코칭스태프보다 경기 상황을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는 포수라면 '야전사령관'이 돼야 한다고 했다.
후배 포수들에게는 '끊임 없이 도전하고 연구하는 선수가 돼라'고 조언한다. 그는 "실패를 하는 것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며 "그 실패를 분석해 본인의 것으로 만들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일"이라고 했다.
더 이상 포수 마스크를 쓴 박경완의 모습은 볼 수 없다. 23년간의 땀냄새 밴 '26번'유니폼을 벗고 지도자 박경완의 이름이 새긴 옷으로 갈아입었다. 지도자로서의 첫 출발. 그는 '배운다는 자세'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당장 내게 중요한 일은 은퇴식보다는 2군 선수들을 지도하고 이끄는 일"이라고 했다. '포수' 박경완이 아닌 '지도자' 박경완의 또 다른 도전은 이미 시작됐다.
나석윤 기자 seokyun1986@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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