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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신간]사랑이 밥 먹여주는 세상, '사랑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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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이윤주 기자]‘사랑이 밥 먹여주냐’는 힐난은 몇 가지 맥락에서 쓰여왔다. 자식의 결혼을 반대하는 TV드라마 속 부모들이 자주 구사하는 클리셰이자, 실연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친구를 향한 안타까운 호통이자, 땅거미처럼 드리우는 고독을 고백한 술자리에서 ‘먹고살기도 바쁜데 배가 불렀군’ 하는 표정과 함께 돌아오는 핀잔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취업난으로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한다는 ‘삼포세대’에는 저 모든 맥락을 따지지 않고 적용할 수 있는 문장이겠다.


그러나 인류가 구축해온 장구한 역사 가운데 사랑의 역사만큼 ‘고요히 역동하며’ 지속되온 게 또 있을까. 전문가들이 사회·문화와 경제 구조의 변혁을 야단스럽게 구분하며 인류사를 고쳐 쓰는 가운데서도, 인종과 남녀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전 인류의 일기장 속에 켜켜이 쌓여온 것이 사랑의 역사다. 사랑은, 세상 그 어떤 난리 통에서도 지독하게 움터왔으며, 세상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은 인간의 일생에도 전설의 웅덩이처럼 고여 있다. 정말 사랑이 밥도 죽도 주지 않는다면 이 질긴 역사가 가능할 수 있을까.


[BOOK-신간]사랑이 밥 먹여주는 세상, '사랑의 역사' 사랑의 역사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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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사랑의 역사’는 1597년에서 2012년까지 동서양에서 발표된 34편의 문학작품을 둘러보며 ‘사랑이 주는 밥’의 고귀함을 나직이 속삭인다. “내 첫사랑보다 더 첫사랑 같은” ‘소나기’의 사랑부터, 사랑의 비극을 예술의 정수에 이르게 한 베르테르의 사랑, 물질이 방해하는 사랑의 풍랑 속에 온몸을 내던진 개츠비와 마담 보바리의 사랑까지, 우리가 익히 들어온 세기의 사랑이 독자의 사랑 속으로 걸어 들어온다.

이 책은 문학 작품 속 사랑을 ‘첫사랑’ ‘열정’ ‘성장’ ‘이별’ ‘도덕과 결혼’ 등으로 나눠 소개하고 있긴 하지만, 그 모든 게 날줄과 씨줄로 촘촘히 엮여 펄럭이는 것이 사랑이란 걸 우리는 알고 있다. 다만 사랑과 더불어 문학 자체를 사랑하는 독자들에겐 저마다의 사랑이 지닌 고유한 빛깔과 향기를 시대와 사회 속에서 따뜻이 비춰주는 저자의 환대도 함께 느낄 수 있다. 예컨대, 요리를 만드는 여주인공의 레시피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지만 ‘끓는 기름 속에 들어간 도넛 반죽처럼 뜨거운’ 사랑의 맛을 에로틱하게 담아낸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시(詩)와 사랑의 동질성을 소재로 인생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등은 격정과 비극으로 버무려지지 않더라도 얼마나 다양한 방식의 러브스토리가 존재할 수 있는지 보여준다. 또한 200명의 여자와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사랑을 반복하는 남자 주인공이 등장하는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존재의 가치를 말하기 위해 사랑이라는 은유를 사용하고, 철학에 다가가는 새로운 프리즘을 제시한다고 설명하는 부분은 오래전 청춘의 한 구석을 아프게 파고들었던 소설의 첫 장을 다시 펴게 만든다. 과거의 사랑이, 돌아보는 순간마다 달리 빛나듯, 사랑에 빠진 소설의 주인공들도 저자의 나긋한 목소리를 통해 예전과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말을 걸어온다.


그러나 저자는 ‘전문직 신랑감’ ‘1등 신부’ ‘공무원 다수 확보’ 등의 문구를 아무렇지 않게 내걸고 있는 결혼시장이 우시장(牛市場)과 흡사하다고 일갈하는 엄중함도 감추지 않는다. 집과 땅과 차가 인간의 자연스러운 사랑을 방해하는 물질주의 사회 속에서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처럼 뒤틀린 사랑을 사랑이라 착각하는 현대인의 불행을 탄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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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꽃에 물 한 방울 주지 않는 사람이 꽃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듯이,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상대방을 무시하고 학대하는 사람의 사랑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저자는 작품 속의 사랑들이 외부의 손이 닿자마자 흩어져 길을 잃을 때마다, 사랑을 ‘학문’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독일의 철학자 에리히 프롬에게 도움을 받았다고 전한다. 프롬은 그 유명한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잘하기 위해선 사랑의 본질을 파악해야 하고 이에 걸맞은 훈련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사랑은 상대방과 나의 생명을 성장시키는 활동이자 결의이고, 판단이자 약속이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34편의 소설 속 사랑을 돌아보는 여정의 말미에 이르러, 누군가를 갈망하는 자체는 아직 사랑이 아니며 그 갈망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자라게 할 때 비로소 ‘사랑’으로 승격한다고 말한다.


책을 덮고 나면 내가 지금껏 ‘사랑이 주는 밥’을 얼마나 끈덕지게 먹고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쩌면, 사랑이 밥 먹여주는 세상이야말로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세상이 아닐까 돌아보게 된다. ‘사랑이란 그 사람만 보이고 다른 것은 모두 배경으로 물러나는 것’이라는 ‘오만과 편견’의 명대사처럼, 이 책을 읽는 내내 세기의 문학을 가로지른 사랑들이 배경으로 물러나고 ‘나를 지나간 사랑들’이 전면에 떠오르는 황홀한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 아직도 ‘사랑이 밥 먹여주냐’고 쿨한 척하는 누군가에게 (그를 사랑하고 있다면 더욱) 선물하고픈 책이다.
사랑의 역사/남미영 지음/김영사/1만3800원




이윤주 기자 sayyunju@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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