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가 끝난 뒤에도 한참동안 빙판을 뜨지 않았다. 김연아(24)는 다시 오지 않을 그 순간을 가슴에 담아 두려는 듯 오래도록 얼음 위에 머물며 관중석에 손을 흔들었다.
김연아의 마지막 무대 '아디오스 노니노'(프리 프로그램)는 흠 잡을 데 없었다. 그러나 개최국 러시아의 텃세가 여왕의 금빛 엔딩을 가로막았다.
김연아는 21일 새벽(이하 한국시간) 소치 아이스버그 스케이팅 팰리스에서 열린 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 프리프로그램에서 144.19점을 받아 쇼트프로그램(74.92점) 합계 219.11점으로 은메달을 차지했다. 전날 쇼트에서 아슬아슬한 1위를 달린 김연아는 러시아 선수 아델리나 소트니코바(224.59점, 쇼트 74.64점ㆍ프리 149.95점)에 5.48점 차이로 역전을 허용, 금메달을 내줬다. 동메달은 이탈리아의 캐롤리나 코스트너(216.73점)에게 돌아갔다.
소트니코바는 자신의 최고점을 20점 이상 경신하며 개최국 러시아에 피겨스케이팅 여자 싱글 첫 금메달을 안겼다. '클린'연기가 아니었지만 홈의 위력은 상당했다. 김연아는 최고의 연기를 펼치고도 올림픽 2연속 우승을 눈앞에서 놓쳤다.
◇ 화려한 탱고, 그러나 금지된 금빛 엔딩= 김연아는 24명의 출전 선수 중 가장 마지막으로 무대에 올랐다. 전날의 긴장된 모습과 달리 한층 몸이 가벼워 보였다.
아스토르 피아졸라의 탱고 음악 '아디오스 노니노'는 김연아에 꼭 맞는 옷이었다. 엇박자의 리듬에 쉴 새 없이 스텝과 안무가 실려있는 상당히 난해한 작품이었지만 김연아는 처음부터 쉬웠던 것처럼 연기했다.
'명품' 트리플 콤비네이션(트리플러츠+트리플토루프)은 물론 트리플 플립, 또 한번의 연속 점프(트리플살코+더블토루프)까지 깨끗한 점프가 차례로 이어졌다. 이후 아름다운 '유나 스핀'을 보여준 김연아는 곧장 스텝 연기에 들어갔다. 탱고 동작을 연상시키는 현란한 스텝과 턴은 '아디오스 노니노'의 백미였다.
김연아는 12가지 과제(점프7,스핀3,스텝1,시퀀스1)를 모두 깔끔하게 해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점수가 발표되자 김연아가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1위를 달리고 있는 소트니코바를 이기려면 149.68점 이상의 점수가 필요했지만 전광판에 찍힌 점수는 144.19점. 클린을 하지 못한 소트니코바의 프리 점수(149.95점)보다 5.76점이나 모자랐다.
◇ 러시아, 그리고 유럽 심판들의 홈 텃세= 소트니코바의 프리 점수는 김연아가 밴쿠버에서 받은 세계신기록 150.06에 육박한다. 더구나 쇼트 프리 합계점수인 224.59점은 지난 1월 유럽선수권에서 세운 개인 최고기록 202.36보다 22.23점이나 많다. 불과 한 달 만에 엄청난 상승을 했다.
이런 결과가 가능했던 건 심판진의 대다수가 유럽인이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된다. 프리 스케이팅에 배정된 심판 중 유럽 출신은 약 70%. 그 중 기술의 수행 여부나 레벨을 결정하는 태크니컬 패널은 3명 전원이 유럽인이다.
유럽은 지난 1994년 옥사나 바이울(우크라이나)이 금메달을 딴 이후 20년 동안 여자 싱글 우승자를 배출하지 못했다. 피겨의 종주대륙인 유럽은 패권을 되찾을 기회를 노려왔다. 더구나 피겨 강국인 개최국 러시아가 유일하게 올림픽 금메달을 따지 못한 종목이 여자 싱글이다. 이런 배경이 소트니코바가 후한 점수를 받는 데 영향을 줬을 것으로 보인다.
소트니코바의 점프는 김연아에 비해 정확성이나 높이, 비거리가 떨어지지만 대부분 1점 이상의 높은 가산점을 얻었다. 방상아 SBS해설위원은 "첫 점프인 트리플러츠는 에지를 잘못사용했지만, 롱에지 판정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가산점을 받았다"고 지적했다. 10대인 소트니코바의 예술점수(74.41점)가 김연아(74.50점)와 거의 비슷한 것 역시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다.
반면 김연아는 유럽 심판들의 텃세에 손해를 봤다. 김연아는 상대적으로 낮은 기초점(기술기본점수)을 높은 가산점(GOEㆍ수행점수)과 예술점수(PCS)로 만회하는 전략을 사용하는데, 가산점과 예술점수는 심판(Judge)들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는 경향이 있다. 김연아는 우승을 차지한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6.51점의 가산점(프리스케이팅) 받았지만 이번엔 12.2점으로 소트니코바(14.11점)보다 적었다.
그래도 여왕은 역시 담대하고 너그러웠다. 김연아는 "좋은 결과를 기대했는데 2등을 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다 했기 때문에 만족스럽다"며 담담하게 소감을 밝혔다. 그리고 시상대에 서 활짝 웃으며 자신의 마지막 무대를 즐겼다.
손애성 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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