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 섬진강 매화꽃길 환상 드라이브‥매화향 가득한 꽃길 따라 봄 손님 오시네
[아시아경제 조용준 여행전문기자]'나막신을 신고 뜰을 거니르니 달이 사람을 쫓아오네/매화꽃 언저리를 몇 번이나 돌았던고/밤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 옷 가득 향기 스미고 달그림자 몸에 닿네./'(퇴계 이황)
매화는 초야에 묻혀 고고하게 살아가는 선비의 품성을 닮아 예로부터 시와 그림의 단골 소재였다. 매화의 가녀린 꽃잎과 은은한 향은 천상의 선녀를 연상하게 한다. 고려의 문호 이규보가 불사약을 훔쳐 달 속으로 달아났던 항아(姮娥)를 매화에 비유한 이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봄이 찾아온다는 전라남도 광양 섬진강변에 매화향이 당도했다.
혹독한 추위가 몰려왔던 지난해와 달리 올해는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며 열흘가량 빨리 꽃을 피웠다. 터질 듯 부푼 꽃망울과 활짝 피어난 매화꽃이 은은한 향을 섬진강에 띄워 보낸다.
겨우내 움츠려 있던 몸과 마음이 천리를 간다는 매화향에 이끌려 섬진강으로 봄 마중을 나섰다.
구례에서 섬진강 물길을 따라 새벽길을 달린다. 몸을 휘감는 바람은 겨우내 매서움은 없다.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남도대교를 건너자 광양땅이 시작되는 861번 지방도로다. 섬진강변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매화꽃길이다. 이 길은 섬진강을 따라 다압면, 매화마을, 수월정, 외압마을, 망덕포구까지 이어지는 33km 길이다.
다압면으로 들어서자 오른쪽 야산에 매화밭이 눈에 들어오고 왼쪽으론 섬진강이 길동무가 된다. 나란히 하는 국토종주 섬진강 자전길도 시원하게 내달린다.
자동차 창문을 내리자 향긋한 냄새가 실려온다. 속도를 줄였다. 눈이 부신다. 꽃눈을 벗어 던진 하얀 꽃송이들이 수를 놓는다. 소학정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있는 늙은 매화나무는 섬진강에서 가장 빨리 피워나는 매화다. 다른 매화나무들이 솜털을 매달고 있을때도 소학정 매화는 활짝 꽃을 피워 온통 하얀 눈송이를 달고 있다. 보통 1월 하순이나 늦어도 2월 초면 만개 한단다.
소학정 마을에서 900m 정도 더 내려가면 농가 마당에 홍매가 활짝 피워나 붉은빛을 토해내고 있다. 벌써 봄이 무르익은 분위기다.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섬진강 물빛에 실린 매화향이 마을을 휘감는다.
여기서 섬진강변의 명물인 청매실농원은 지척이다. 매실 명인인 홍쌍리 여사가 40여년 동안 백운산 산비탈 12만평을 일군 농원은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매화꽃을 자랑한다.
입구에서부터 청매화, 백매화, 홍매화가 소담스런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매화꽃이 하나 둘 피기시작한 농원에 들면 누구나 시인이요, 예술가가 된다. 활짝 핀 매화에서 느껴지는 도도함과 청초함은 그야말로 최고다.
10여분 언덕을 오르자 2500여개의 장독이 모여 있는 살뜰한 마당이 나타난다. 장독에는 매실된장, 매실 고추장 등이 이른 봄볕의 사랑 아래 익어가고 있다.
매화나무 밑엔 따로 청보리를 심어 녹색치마를 걸친 듯한 보리와 청매ㆍ백매ㆍ홍매 꽃무리가 선명하게 대비를 이룬 모습이 환상이다. 매화나무, 대숲, 장독대, 흙 길, 메주 등 어느 것 하나 튀는 법 없이 자연스럽다. 그래서 농원은 '서편제', '취화선', '다모', '천년학' 등 여러 영화와 드라마의 단골 촬영지였다.
청매실농원의 장독대 옆 오솔길은 상춘객들이 즐겨 찾는 산책로다. 팔각정 전망대에 오르면 문학동산 너머로 전라도와 경상도를 흐르는 섬진강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강 건너 하동 땅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소. 강줄기를 따라 시선을 옮기면 멀리 박경리 소설 '토지'의 무대인 평사리가 봄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린다.
퇴계 이황이 노래했 듯 밤에 보는 매화꽃도 가히 일품이다. 해가 지고 하늘이 어둠에 물들면 백매화가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난다. 이어 섬진강 물줄기도 하얀 매화빛으로 젖어가는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황홀함이다.
이런 풍경에 홍씨는 "바람 한점 없는 밤 달빛 아래서 '툭툭' 꽃망울 터지는 소리에 가슴이 설레었다"고 말한다.
섬진강변의 매화는 3월초부터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해 중순에는 온 마을이 함박눈이 내린 겨울날처럼 새하얀 별천지가 된다.
농원을 내려서면 수월정이다. 조선 선조 때 나주목사를 지낸 정설(鄭渫)이 세운 정자. 훗날 섬진강변을 하얗게 물들인 매화를 상상이라도 한 듯 수월정을 오른 송강 정철은 "물은 달을 얻어 더욱 맑고 달은 물을 얻어 더욱 희다"고 읊었다.
외압마을을 지나 남해바다와 만나기 전 폭을 한껏 넓힌 섬진강은 나룻배들이 한가롭고 무심한 오리떼는 자맥질이 한창이다.
매화꽃길의 끝은 망덕포구다. 망덕은 무주 덕유산이 보인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포구에선 윤동주 시인을 만날 수 있다. 일제강점기이던 1941년 윤동주는 시집을 발간하려 했으나 일제 탄압으로 여의치 않게 되자 자필원고를 절친한 후배 정병욱에게 맡겼다. 시인이 일본에서 옥사하고 난 후 유고는 마룻장을 뜯어내고 보관했던 후배에 의해 1948년 간행됐다. 포구에는 자필원고를 숨겨두었던 가옥이 남아 있다.
가을전어로 유명한 망덕포구에는 이제 막 강굴(벚굴)잡이가 시작됐다. 어른 손바닥보다 더 큰 강굴은 한 입 넣으면 바다의 싱그러운 냄새와 봄의 향기가 입안 가득하다
여기서 봄 마중을 마쳐도 좋지만 광양을 찾았다면 옥룡사지 동백숲을 빼놓을 수 없다.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절집터인 옥룡사지 동백숲은 7000여그루나 된다. 아직 꽃눈을 살짝 여민 정도지만 섬진강변의 매화가 만개하면 동백도 활활 타오를 터이다.
여기에 백운산 자락의 절집 중흥사로 오르는 길에 만난 운평리 들녘의 봄빛도 느껴볼만하다. 보리밭과 함께 소나무, 동백나무,치자나무, 광나무가 줄지어 심어진 들은 초록과 빨강, 노랑의 이파리들이 햇볕에 화려한 봄색을 선사하고 있다. 그 길을 넘어가서 마주한 고즈넉한 중흥사와 저수지 중흥제에도 탱탱하게 봄날의 물이 올라 있다.
광양=글 사진 조용준 여행전문기자 jun21@asiae.co.kr
◇여행메모
△가는길=경부선을 이용해 가다 호남고속도로 순천완주고속도 구례 화엄사IC를 나와 용방교차로에서 구례, 지리산국립공원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구례로를 따라 15km 가면 하동 화개마을이다. 이어 남도대교 건너 좌회전하면 861번 지방도로가 시작된다. 여기서 16㎞정도 가면 청매실농원이다.
△축제=광양 매화마을에선 3월 22일부터 30일까지 '국제매화문화축제'를 연다. 축제는 매화 특유의 멋과 향을 느낄 수 있는 체험행사 위주로 펼쳐진다. 매화는 축제기간전에도 감상할수 있다. 축제기간에는 차량들이 많이 몰리는걸 명심해야 한다. 광양시청(061-797-3714~6). 청매실농원(061-772-4066)
△먹거리=광양의 먹거리는 단연 보통 불고기와 달리 국물없이 양념을 바른 쇠고기를 석쇠에 구워먹는다. 삼대광양불고기집(061-762-9250), 매실한우(061-762-9178) 등이 소문났다. 섬진강변에 있는 섬진강 고향집(061-772-0766)은 재첩요리 전문집이다. 또 망덕포구에는 강굴을 먹을 수 있는 식당들이 몰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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