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섬의 스토리텔링-퇴계의 사랑, 두향(12)
양진암은 참마음을 키우는 집이다. 이황이 회재의 그 뜻을 다시 새겨 공부방의 이름으로 쓴 것이다.
그리고 토계라는 지명을 고쳐, 퇴계(退溪)로 바꾼다. 토계는 단순한 지명이었으나, 퇴계가 되면서 의미심장해진다. 세상에서 물러나 묻혀사는 골짜기라는 뜻이 되었다. 은자(隱者)로 살고자 하는 스스로의 뜻을 굳히며, 쉼없이 흐르는 계곡물처럼 학문과 경륜을 제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욕까지 담고 있다. 그는 '퇴계'를 자신의 아호(雅號)로 쓰기 시작한다. 그뒤 홍문관서 잠깐 근무하다가 물러난 뒤 1548년 1월 외직근무를 자청하여 단양군수로 왔다. 조정의 권유와 간청을 못이겨 관직을 맡긴 했지만, 그는 이미 '물러나 숨은 사람'이라는 퇴계(退溪)정신을 마음에 깊이 품었다. 정치적인 욕심도 없었고 속세에 대한 미련도 이미 놔버렸다. 다만 이 무상한 삶에서 참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순수한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지키고 닦으며 살다 죽어야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마음을 두기 시작했다. 돌아누우며 퇴계는 생각했다. 두향이 내게 온 것은, 마흔이 저물어가도록 제대로 벙글어보지 못한 사랑을 제대로 이뤄보라고 하늘이 베푼 은혜일진저! 천성의 매화향기를 아껴 맡으며, 삶의 신산을 이겨내라는 응원일진저! 삶은 그래도 아름답구나.
이튿날 아침 일찍 두향이 사또의 내당으로 달려왔다. 침방으로 들어와 보니 침실 문이 이미 활짝 열려 있다. 퇴계는 이미 보이지 않는다. 신선한 공기로 바꾸려고 문을 열어두고 나간 게 틀림없었다. "새벽 나절에 어디 가셨을까?" 두향은 청소를 하려고 머리에 수건을 쓰고 빗자루를 들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방안이 이미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다. 두향은 걸레질을 하고는, 집에서 들고온 커다란 분(盆)받침 하나를 퇴계의 책상 옆에 놓았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이 특이한 물건은 어머니가 간직해온 최고의 유품이었다. 밑바닥 지름은 한뼘반쯤 되고 높이는 두뼘쯤 되는 아름다운 장식품이었다. 두향은 이것을 퇴계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밤새 그 생각을 하다가 새벽이 되자 관청의 심부름하는 어린 노복을 깨워 묵직한 그 물건과 그 위에 놓을 수양매 분재를 들고 뛰어온 것이었다.
한편 퇴계는 남한강과 단양천을 둘러보고 있었다. 당시 이 고을은 삼년째 지독한 가뭄을 겪고 있었다. 흉년에 주린 백성이 도처에서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그가 관속에게 "이곳은 강이 많아 물걱정이 없을 듯한데, 어찌하여 해마다 한발을 겪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물이 많은 건, 오히려 홍수만 키우지 가뭄 때는 같이 말라버려서 아무 소용도 없사옵니다."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해 보이는 말이었지만, 참으로 한심한 대답이었다. 저렇게 생각해왔다면 관청에서 제대로 치수(治水)를 했을 리가 없다. 퇴계는 우선 현장을 살펴보기 위해 강부터 찾았던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강과 하천은 거의 손을 댄 흔적이 없었다. 퇴계는 지형을 살피며, 홍수 때 물이 넘나드는 급류지역과 상습홍수 지역을 조사하고 또 가뭄에 피해를 겪고 있는 논밭들 사이로 수로(水路)를 개척할 수 있는지 따져보고 있었다. 시급하게 해야될 일은 보(洑)의 설치였다. 홍수 때는 흘러내려가는 수량을 조절하고 가뭄 때는 받아놓은 물을 활용하여 농수로로 흘려보내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는 이렇게 관속들과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대책을 의논한 뒤 새롭게 시행할 정책을 내놓았다.
첫째는 농한기를 이용해 강과 하천의 곳곳에 보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마침 가뭄으로 강바닥이 드러나 있어서 공사를 하기에는 적기였다. 그리고 이 관청의 공사를 진행하기 위해 백성들 중에서 가장 형편이 어려운 자를 중심으로 일꾼을 뽑기로 했다.
둘째는 관(官)에서 쓰는 경비 일체를 재점검하여, 최소화하고 절약되는 부분을 기민(饑民) 구제에 우선적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셋째는 도탄에 빠진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부자들과 관원들이 솔선하여 생활을 검소하게 하고 스스로 여재를 털어 백성들을 돕도록 했다. 사치와 퇴폐의 풍속을 단속하는 것도 포함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퇴계는, 깜짝 놀랐다. 책상 옆에 처음 보는 진기한 도자기 받침이 하나 놓였고 그 위에 아름다운 수양매가 아직 꽃을 피우지 않은 가지를 드리운 채 놓여있었기 때문이다.
"두향이는 어디에 있느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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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46세 퇴계는 삶을 다시 생각했다
이상국 편집부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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