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도서관 2층 어ㆍ문학실 서가의 상당 부분을 무협지가 차지한 적이 있다. 가끔 이곳에 들렀다가 독서 삼매경에 빠진 사람들을 보게 됐다. 무슨 책이길래 저리 몰입해서 읽을까 흘끔 보고 무협지임을 알게 됐다.
무협지에 몰입한 모습을 보면서 장르를 막론하고 한 분야에 빠진 사람이 부러워졌다. 그런 사람은 나처럼 종종 휴일을 뭘 하며 보낼지 막막해하지 않을 테니까.
그 일요일도 그랬다. 가족과 함께 점심을 느긋하게 먹은 뒤 국립중앙도서관에 갔지만 읽어야 하거나 읽고 싶은 책이 없었다. 2층으로 올라가는 동안 전에 신문 서평란에서 본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떠올랐다. 서가에서 책을 꺼내 자리에 앉았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흘러간다.
스웨덴 노인 알란 칼손은 100회 생일에 충동적으로 양로원을 탈출한다. 평생 세계의 격변을 현장에서 겪은 그로서는 시골 양로원을 인생 최후의 장소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게다.
알란은 다시 세상에 뛰어들기 직전, 그러니까 버스 터미널 대합실에서 갱단 멤버 '볼트'와 마주친다. '네버어게인' 조직원 볼트는 알란에게 자기가 큰일을 보는 동안 잠시 제 트렁크를 지켜달라고 명령하는 투로 말한다. 알란의 충동이 다시 꿈틀댄다. 그는 곧 출발하는 버스에 올라탄다. 버스 기사 도움을 받아 트렁크를 짐칸에 싣고.
알란은 정처 없이 떠난 길에서 일행을 만들게 되고 소설은 빠른 속도로 내달린다. 네버어게인 보스가 직접 나서고 결국 알란 일행을 붙잡는다. 권총을 든 보스가 일행을 늘어 세우고 "트렁크의 내용물이 얼마나 줄었는지에 따라 너희 생사를 결정하겠다"며 딱딱거리는 상황에서 반전이 일어나는데….
책은 아직 절반이나 남았다. 하지만 난 여기서 책을 딱 덮었다. 그리곤 도서관 창구에 반납했다. 재미가 없어서는 결코 아니었다. 다음 장면이 궁금해 책장을 슥슥 넘기다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큭큭거리게 되는 책이었다. 알란 노인의 모험담은 '아껴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다음 일요일, 혹은 그 다음 일요일을 위해서.
이날 난 깨달았다. 하고 싶은 일의 목록인 버킷 리스트를 정해두는 것도 좋지만, 시간이 날 때 마저 할 재미난 일을 여럿 시작해 남겨두는 편이 더 낫다는 것을.
아, 알란 노인의 모험담은 얼마 뒤에 가서 마저 읽었다. 나머지 절반은 전반부에 못 미쳤다.
백우진 선임기자 cobalt10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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