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절로 경의를 표하게 되는 말, 용어들이 있다. 이들 말은 우리로 하여금 마치 의무감과도 같이 그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키게 하는데, 그 중 하나로 '민(民)'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백성'이라는 본래의 의미가 갖는 무게에다 민주주의의 역사적 전개를 통해 이 말은 더욱 강고한 아성을 쌓아 왔다. '시민' '국민'이라는 말이 발산하는 영예스런 기운에서 느껴지듯 이 고귀한 가문의 '민'이라는 말이 일으키는 마법은 그 말이 들어감으로써 자신이 속한 말까지 격상시켜 주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이를 예컨대 '민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오랫동안 '민영화'라는 말이 갖게 했던 착시, 즉 민영화를 곧 국민이 주인이 되는 것을 얘기하는 것으로, 그래서 민영화가 곧 민주화며 발전이며 개선인 것으로 보이게 했던 것에는 이같은 혈통의 비밀이 있었다.
'민'과 달리 궁지에 처해 있는 말로 '공(公)'을 들 수 있다. 공공 부문에 쏟아지는 많은 지탄으로 인해 '공'은 비효율이나 후진, 낭비와 거의 동일어가 돼 있다. 이렇게 해서 많은 이들 사이에서는 '민' 대 '공' 사이에 대립 관계가 성립돼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 외피를 벗겨보면 다른 진실이 나타난다. 실은 민은 곧 공이고 공은 곧 민이니, 공화국이라고 할 때 그것은 하나의 공동체, 즉 공동의 정치공동체의 구성원인 민을 전제로 하는 것이어서 민과 공은 길항이 아닌 오히려 동반과 일체의 관계라고 해야 마땅한 것이다.
이 왜곡된 구조는 그러므로 민을 좀 더 엄격히 사용하는 것으로 개선될 수 있다. '민'이 드리우는 후광과 권위를 생각할 때 이를 좀 더 엄격히 쓸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건 적잖은 경우 민을 '사(私)'로 바꿔놓는 것으로써 가능하다. 가령 민영화는 소유구조와 운영의 사영화로 얘기해야 더 적확해질 것이다. 그럴 때 공의 대척점에 민이 아닌 사가 들어설 것이며 비로소 민과 공을 둘러싼 신비의 외피가 벗겨질 것이다. 그럴 때 민영화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냉철하게 보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지금의 철도 파업은 과거 철도산업 구조개편에 대한 '전력(前歷)'과 현실의 여건 등을 볼 때 궁극적으로 민영화로 가는 수순이라는 의심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인 듯하다. 민영화든 사영화든 그 자체로 불순으로 내몰려서는 안될 것이다. 다만 공과 민과 사에 대해 엄정하게 살펴보는 것이 그 논의의 한 출발점이 돼야 할 듯하다.
이명재 사회문화부장 prome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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