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한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스스로 연구했다. 그 연구의 한 갈래를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에 남겼다. 세종은 '월인천강지곡'을 손수 지었고, '용비어천가'는 준비부터 간행 때까지 직접 챙겼다.
두 책의 한글 받침(종성)에는 ㅈ, ㅊ, ㅌ, ㅍ 같은 낱자가 들어갔다. 당시 나라에서 제정한 한글 맞춤법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간행된 '석보상절'이 전적으로 그 규정에 따른 것과 대조적이다.
첫 맞춤법 규정은 '팔종성가족용(八終聲可足用)'이다. 쉽게 쓰자고 만든 한글이니 받침은 간편하게 ㄱ, ㄴ, ㄷ, ㄹ, ㅁ, ㅂ,ㅅ, ㅇ 이 여덟 자음만 쓴다는 것이다. ㅈ과 ㅊ은 ㅅ으로, ㅌ은 ㄷ으로, ㅍ은 ㅂ으로 쓰면 된다는 말이다. '배곶'과 '갗(가죽)'의 ㅈ과 ㅊ을 모두 ㅅ으로 표기한다고 예시한다. 이 규정은 1446년에 발간된 '훈민정음'을 통해 공포된다. '훈민정음' 중 해례에 이 규정이 나온다.
왕이 주도한 간행물에서 누가 감히 첫 맞춤법 규정을 어겼을까? 세종 아닌 다른 인물을 생각하기 어렵다.
세종이 자신의 맞춤법 원칙을 지키려 한 흔적은 '월인천강지곡'을 교정한 과정에서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이 책은 제본을 앞두고 여러 군데 받침이 고쳐진다. ㅅ이 ㅈ과 ㅊ으로 수정되고 ㄷ은 ㅌ으로, ㅂ은 ㅍ으로 바로잡힌다. 그 방법 중 하나는 수정 획을 새겨서 받침 위에 도장 찍듯 추가하는 것이었다. (안병희, 월인천강지곡의 교정에 대하여)
세종은 왜 팔종성 이외의 받침을 고집했나? 세종의 간행물에서 '기타 자음'은 '빛(光)' '낱(個)' '깊다(深)' '높다(高)'처럼 어간을 살리는 데 받쳐졌다. 어간을 분리해 표기하는 방식은 '눈에' '안아' '담아' '남아'와 같은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이 맞춤법은 주시경이 '대한국어문법'에서 "깊다에서 ㅍ을 적는 것은 이것이 본음이기 때문"이라고 정리한 1906년 이전에는 사람들의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세종은 '훈민정음' 해례를 편찬한 신하들의 주장에는 한 발 물러섰지만, 자신의 맞춤법 이론이 옳다고 믿었고 이를 따랐다. 창제 이후 한글이 쓰이도록 하는 과정에서도 세종은 고독했다.
백우진 선임기자 cobalt10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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