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고독했다. 지금에야 한글이 인류가 글자를 만든 이래 가장 탁월한 문자임을 앞다퉈 논하지만, 창제 당시에는 한글을 문자로 쳐주지도 않는 분위기였다.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 등은 1444년에 올린 상소문에서 한글은 "폐단 없는 이두를 고쳐 만든 야비하고 상스러우며 무익한 글자"이며 "문자와 조금도 관련됨이 없고 오로지 시골의 상말을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상소를 계기로 벌어진 논쟁에서 어느 신하도 세종의 논리를 지지하지 않았다.
눈여겨볼 대목은 한글에 대한 반발이 이때 한 번에 그쳤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가 알게 된 세상의 문자에 대한 지식을 전제로 상상하면 1443년 훈민정음 창제는 반대하는 측에서나 찬성하는 편에서나 혁명적인 일로 받아들였을 것 같지만, 그때 대다수 관료들에게 한글은 품격을 떨어뜨리는 하찮은 기예에 불과했다. 그래서 최만리 등은 점잖게 상소문을 한차례 올렸을 뿐 한글을 다시 논쟁거리로 삼지 않았다.
한글은 조선시대 내내 주변에 머물렀다. 한자와 한자를 바탕으로 공고하게 구축된 성리학적인 사회 질서에 끼어들지 못했다. 다만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히 스며들었다.
한글 창제에 대한 서술은 이런 '당대의 눈'으로 바라봐야 제대로 읽을 수 있다. 훈민정음은 왕의 치적으로 돌릴 성과가 아니었다. 따라서 조선왕조실록에 남은 "임금이 친히 지었다(親制)"는 기록은 영광을 세종에게 바치기 위한 수사(修辭)가 아니라 사실을 전하는 문구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세종이 직접 한글을 창안했다는 사실에 먼지가 내려앉는다. 그 위에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에게 지시해 한글을 만들게 했다는 추측이 얹어진다. 언어학자 이기문은 논문 '훈민정음 친제론'에서 성현의 책 '용재총화'에서 그 기원을 찾는다. 성현은 "세종이 언문청을 설치해 신숙주, 성삼문 등에게 명하여 언문을 만들었다"고 적었다. 한글이 창제된 지 몇 세대가 지난 뒤였다.
당대에 평가 대상조차 되지 못했던 한글은 이제 세계 최고의 위상에 올려졌다. 하지만 창제자 세종은 아직도 많은 편견과 오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것이 언어학자 세종이 겪은 570년 동안의 고독이다.
백우진 선임기자 cobalt100@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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