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난 허선생님을 조금 좋아하긴 했어요. 수관 선생 말이예요. 그는 예전에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무척 지성적이죠. 몇 달 전 발을 삐어 침을 맞으러 갔다가 알게 되었어요. 그때 난 그가 이런 골짜기에서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란 걸 단번에 알아 차렸죠.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남달랐고, 무엇보다 생각이 깊었어요. 조금 복잡하긴 하지만.... 그 분이라면 나의 뜻을 십분 이해해주실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어요.”
남경희는 뒤에서 따라오며 마치 고백이라도 하듯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나는 처음으로 그에게서 어떤 연정 같은 걸 느꼈어요. 그래서 만일 이곳에 기도원을 짓게 된다면 나는 기꺼이 모든 것을 그 분에게 맡기고 싶은 마음까지 들었어요. 그래요. 그는 어쩌면 처음으로 내 마음을 온통 흔들어놓은 사람인지도 몰라요.”
그녀는 의외로 순순히 수관 선생과의 관계를 털어놓고 있었다.
아마 그에 대한 실망이 분노로 이어져서 그런지 몰랐다. 그런데다 그런 이야기를 하림 외에는 달리 털어놓을 데도 없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하림은 묵묵히 계곡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겨 놓으면서 등 뒤에서 들려오는 그녀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는 약간 숨 찬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그 분은 냉소주의자예요! 세상을 다 껴안고 사는 것 같지만 손톱만큼도 세상과 상관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 말이예요. 인간에 대한 기대나 신뢰 같은 건 아예 버리기로 작정한 사람 같이.....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말처럼, 희망을 버려라, 그러면 행복할 것이다. 그런 식이지요. 그래요. 난 아직도 그 분을 존경하고, 이런 말 하면 어떨지 모르지만 조금은 사랑하고 있어요.”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하림은 여전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발아래만 보며 걸어갔다.
얄궂은 것이 세상이다. 얼마 전에는 그녀를 향한 운학의 분노에 찬 고백을 들었는데 지금은 그녀로부터 다른 사랑에 대한 고백을 듣고 있었다. 차라리 듣지 않고 말하지 않은 편이 더 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자기가 그 둘의 이야기를 다 들어준 꼴이 된 것이었다.
그녀에게 운학의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좋을까. 그러면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림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머리만 복잡해질 뿐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에겐 자기대로 생각해야할 일이 많았다. 당장에 하소연이 일만 해도 그렇고, 이제 곧 만나게 될 혜경이, 그리고 배문자로부터 받은 숙제도 남아 있었다. 그런 판에 남의 일이나 다름없는 그들 사이의 사랑의 방정식에까지 신경 쓰고 자시고 할 여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들 물귀신처럼 하림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고백을 듣게 하려는 것 같았다.
그런 하림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남경희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 분은 가까이 가면 가까이 갈수록 더욱 멀어지는 그런 종류의 사람이죠. 오늘에야 난 분명히 알았어요! 더 이상 그 분에게 기대할 것이 없다는 것을요. 기도원은 꼭 지을 거예요!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그녀는 다시한번 다짐이라도 하듯 큰소리로 외쳤다.
“송사장 무리들, 놀이시설을 들여오겠다고 지금 땅을 파재끼고 멀쩡한 개를 총으로 쏘아 죽이고, 온갖 위협을 일삼는 그 자들이야말로 탐욕과 악의 화신이예요. 사탄의 무리들이죠. 그들에게 굴복하는 것은 말이 안 돼요. 장선생님, 도와주실거죠?”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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