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제시 리버모어, 1907년 금융공황으로 '월가의 큰곰' 등극
[아시아경제 전필수 기자]뉴욕에서 두번째 망가진 리버모어(Jesse Rivermor)가 재기 발판을 마련한 곳은 역시 사설 거래소였다. 1902년 사설 거래소에서 충분한 자금을 마련하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왔다.
이후 1906년 4월 유니온 퍼시픽 주식을 공매도 해 25만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실패 후 재기를 하는 과정에서 그의 투자규모와 수익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던 것.
리버모어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1907년 금융공황이 발생했을 때다. 이 금융공황은 널리 알려진 1929년 대공황과는 다른 사건이다.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인한 혼란과 영란은행(영국 중앙은행)의 미국 금융어음 규제가 맞물리면서 미국 증시가 패닉상태에 빠져들었었다.
1907년 10월24일 정오 무렵, 주식시장이 대폭락을 시작했다. 이때 리버모어는 지속적인 공매도로 단 며칠만에 1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3000만달러에 달한다는데 경제규모를 감안하면 파장은 훨씬 더 컸다. 리버모어의 계속되는 공매도에 J.P모건이 공매도를 멈춰달라고 요청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J.P모건은 100년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세계 정상의 투자은행이다.
리버모어는 당시를 "내 인생의 최고의 날"이라고 회고했다고 한다. 리버모어는 다음 날 아침 시가에 공매도를 시작해 투매를 촉진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상 시장을 붕괴시키고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기회였지만 리버모어는 공매도 포지션을 청산해 상승을 유도했다. 그는 여러 종목을 대량으로 매수했다가 다른 매수자들에게 넘기며 3백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이후 리버모어는 '월가의 큰곰'이란 별칭으로 불리며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1920년대에는 주식시장이 이유없이 급락을 하면 리버모어의 공매도 때문이란 루머가 습관처럼 돌 정도였다.
1907년의 대성공 후 1920년대까지 리버모어가 승승장구만 한 것은 아니었다. 1908년 면화와 밀 상품거래에서 또 다시 쪽박을 찼다. 퍼시 토마스란 상품전문가의 조언을 따른 것이 화근이었다. 정보에 좌우되지 않는다는 자신의 원칙을 어긴 대가였다.
리버모어는 다시 돈을 빌려 사설 거래소로 가야 했다. 2만5000달러를 빌린 그는 석달만에 11만2000달러의 수익을 올려 트레이더로 재기했지만 부채총액이 100만달러를 넘어 파산상태를 면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트레이딩으로 꾸준히 성적을 올리며 빚을 갚아 나갔다. 강세장에서 약세장으로 전환하는 타이밍을 포착해 대규모 공매도 거래로 큰 수익을 올려나갔다. 세번째로 파산한지 9년만인 1917년에는 모든 빚을 갚고, 가족이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보장연금과 산탁자산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안정적 토대를 갖춘 후 1924년과 1925년에는 밀 상품시장에서 1000만달러의 수익을 올리며 '월가의 큰곰'으로 우뚝 섰다.
전필수 기자 philsu@asiae.co.kr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