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의 일부 제품이 삼성전자의 특허를 침해했으니 그 수입을 금지하라는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지난 6월 결정 및 권고에 대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엊그제 거부권을 행사했다. ITC 결정에 대한 미국 행정부의 거부권 행사는 1987년 이후 26년 만에 처음일 정도로 이례적인 조치다.
내건 명분은 프랜드(FRAND) 원칙이다. 국제적 표준으로 지정된 표준기술에 대한 특허인 표준특허는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비차별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가 된 삼성전자의 특허는 표준특허이니 이 원칙에 따라 애플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ITC라고 이 원칙을 모르는 게 아니다. 삼성전자는 자사가 보유한 표준특허의 사용 허가에 성의를 보였지만 애플이 관련 협상에 성실하게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ITC가 삼성전자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이번 미국의 거부권 행사는 국제통상 상식을 거스른 정치적 조치다. 무엇보다 '미국의 경쟁여건에 미칠 영향과 미국 소비자에게 미칠 영향 등 다양한 정책적 고려에 따른 것'이라는 마이클 프로먼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의 설명이 이를 확인케 해준다. 미국 행정부가 미국 기술기업의 상징과 같은 애플을 정치적으로 구제한 것이다. 당사자인 애플을 비롯한 미국 정보기술 산업계의 눈치도 봐 가면서 내린 조치인 게 분명하다.
이로써 미국 행정부의 정책은 적어도 지적재산권ㆍ경쟁ㆍ통상 등 3분야에 걸쳐 객관성과 중립성 면에서 상처를 입게 됐다. 미국이 자임해 온 국제적 기준 설정 역할에서 자국 이기주의가 이처럼 적나라하게 표출된다면 국제 통상질서가 크게 흔들릴 수 있다. 당장 다른 나라들이 미국처럼 프랜드 원칙의 확대 적용에 나선다면 국제 표준특허 체제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오는 9일에는 ITC가 애플이 삼성전자를 특허 침해로 제소한 사건에 대한 판정을 내릴 예정이다. 이를 두고 국내 일각에서 '이번에도 미국 행정부가 애플 편을 드는지 두고 보겠다'는 식으로 날을 세운다. 그러나 이런 반응은 무의미하다. 이 사건은 표준기술이 아닌 상용기술에 관한 분쟁이어서 경우가 다르다. 그보다는 노골화한 보호무역주의에 대해 우리 기업과 정부가 전략적 대응태세를 가다듬는 일이 중요하고도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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