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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 - 5장 저수지에서 만난 여인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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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들의 사생활 - 5장 저수지에서 만난 여인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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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이번 개의 죽음과도 무슨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하림은 곧 고개를 저었다. 거기까지 가기엔 비약이 있었다. 그 둘은 전혀 별개의 일일 것이고, 영감이 쏘아죽였건 다른 누군가 쏘아죽였건 개를 쏜 것은 분명 엽기적 취향을 지닌 어떤 인간이 저지른 별개의 일일 것이었다.

세상엔 상식이란 것이 있는 법이다. 처녀가 아이를 배도 상식이 있고, 국세청 직원이 세금을 떼어먹어도 상식이 따르는 법이다. 그리고 진실은 그런 상식적 판단에서 과히 멀지 않는 법이다. 처음 윤여사의 말대로 윤여사네 고모할머니 누렁이 두 마리가 영감의 잔디밭에서 함부로 실례를 하자 머리가 약간 이상한 영감이 격분한 나머지 엽총으로 쏘아죽였다, 가 그런 상식적 판단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 아닐 터이다. 읍내에서 경찰까지 나와 그런 현장을 확인하고 갔다지 않았던가.


그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는데 문득 방죽 반대편 끝에서 하림 쪽을 향해 걸어오고 사람의 그림자가 얼핏 비쳤다. 텅 비어 있던 저수지의 정물화 같았던 풍경이 그 사람의 출현으로 갑자기 균형이 깨져버린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나타난 사람 그림자에 하림은 자기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누굴까....?
하림은 여전히 같은 보조를 유지한 채 긴장된 시선으로 멀리 걸어오고 있는 그림자를 지켜보았다.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지만 금세 중년의 여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여자는 까만 자켓을 걸치고 나풀거리는 긴 까만 치마를 입었다. 그리고 까만 선글라스까지 하고 있었기 때문에 온통 까만색으로만 보였다. 까맣지 않은 것은 그녀가 쓰고 있는 햇빛 가리개용 챙이 넓은 모자 뿐이었다. 모자는 연보라색이었다.
우루루 쾅쾅거리는 소리가 이 시골 골짜기의 정적과 어울리지 않듯이 그런 여자의 차림새나 모습 역시 유원지도 아닌, 이런 시골 저수지의 풍경과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여자는 하림의 존재를 아직 알아채지 못했거나 다른 사람 따위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는 듯이 걸어오던 방향대로 계속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하림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하림은 역시 가던 방향으로 계속 걸어갔다.
가는 사람과 오는 사람은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한 점에서 마주치게 되어 있는 법이다. 그 마주치는 점을 향해 하림과 여자는 저수지를 끼고 천천히, 그리고 서로가 전혀 서로를 의식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걸어가고 있었다. 의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식하고 걸어가니 발걸음이 더 어색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그럴 필요가 없다고 의식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림은 여자와 거리가 점점 좁혀지자 자기도 모르게 이상하게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누굴까.... 이런 시골에서.... 온통 검은 옷에.....별 꼴이군.’
하림은 혼자 중얼거렸다.
아마도 호젓함 때문일 것이다. 이 호젓한 시골 저수지 길에서 그런 온통 까만색 차림의 낯선 여자와 마주친다는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신경 쓸 거 없어. 검은 옷으로 감았든 빨강 옷으로 감았든, 또 누군인들 무슨 상관이랴.’
그렇게 애써 무시하며 하림은 될 수 있는 한 여자를 의식하지 않고 멀찌감치 벌어져서 걸어갔다.


글 김영현 / 그림 박건웅




오진희 기자 val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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