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품 생산과정에 들어가는 '가상수' 주목, 육류 소비만 줄여도 물 40% 절약 가능
[아시아경제 이상미 기자]한 모금에 지나지 않는 에스프레소에 140리터나 되는 물이 들어갔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마시는 액체의 양만 따져보면 이런 주장은 터무니없는 소리처럼 들린다.
하지만 에스프레소에 숨겨진 가상수(vitual water)까지 고려하면 에스프레소 한잔을 마시는 데 소비하는 물의 양은 140리터가 맞다. 이때 가상수란 커피콩을 재배하고 생산하고 포장하고 운송하는 데 들어간 물의 양을 뜻한다.
커피를 환경적으로 무해한 일상의 즐거움이라 여겼던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꽤 충격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아침식사에 들어가는 전체 가상수에 비하면 이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토스트 한두 조각, 베이컨과 달걀, 우유 한 컵 등 미국식 아침식사에 들어가는 가상수를 따져보면 물로 가득 찬 욕조 3개 분량의 물이 필요하다. 리터로 환산하면 1100리터의 물이 필요한 셈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간과해선 안되는 물은?= 물 문제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토니 앨런(Tony Allen) 런던 킹스칼리지 교수는 신간 '보이지 않는 물 가상수'에서 물 소비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을 고발한다. 식품이나 제품이 생산돼 유통 과정을 거쳐 소비될 때까지 들어가는 물의 총량을 일컫는 '가상수'라는 개념은 세계적으로는 널리 통용되고 있지만 아직 우리에겐 친숙하지 않다.
'가상수'를 좀 더 쉽게 이해하려면 아르옌 훅스트라의 '물 발자국'(Water Footprint)개념을 활용하면 된다. '물 발자국'이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식품이나 제품을 생산, 소비하는 데 얼마나 많은 양의 물이 필요한지 나타내 주는 지표로 쓰인다.
문제는 지금까지 우리가 '가상수'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물을 사용해왔다는 점이다. 우리는 마시거나 변기를 내리거나 씻거나 세차하거나 꽃에 물을 줄 때만 '물을 쓴다'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고, 직접 쓰는 물만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소비하는 물의 90%는 식품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물이다. 저자는 우리가 직접 쓰는 물을 '스몰 워터(small water)', 식품에 들어가는 물을 '빅 워터(big water)'로 정의하면서 이 둘을 구분지었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스몰 워터가 아닌 빅 워터의 관점에서 물 부족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가 단순히 스몰 워터만을 고려해 물 부족 대책을 세우는 것은 건전지 사용을 제한해 에너지를 절약하겠다는 정책과도 같다고 비판한다.
◇육류소비 줄이는 게 물 발자국 줄이는 길= 그렇다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빅 워터를 아끼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저자는 물 소비량의 90%가 식량 생산에 들어가기 때문에 식량 소비 습관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는 강조한다. 특히 생산하는 데 물이 가장 많이 필요한 식품인 육류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쌀 1킬로그램을 생산하는 데 물 3400리터가 든다면, 쇠고기 1킬로그램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물은 1만5500리터다. 만약 소고기의 가상수를 시장가격에 그대로 반영한다면 스테이크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을 수밖에 없다.
채식주의자와 비채식주의자가 하루 동안 먹는 데 사용하는 물의 양을 비교해보면 거의 두 배가량 차이가 난다. 비채식주의자가 하루 세끼의 식사를 하면서 사용하는 물은 총 5000리터로 물이 가득 찬 욕조 15개 분량이다. 반면 채식주의자가 하루에 사용하는 물은 총 2700리터로 물이 가득 찬 욕조 8개 분량만 있으면 된다.
저자는 물론 개인의 식습관을 바꾸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점과 고기 섭취를 줄이는 것만이 유일한 정답은 아니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깨끗한 태양에너지를 사용한 담수화 과정 등 다른 해결책은 당장 현실에 적용하기 힘든 형편에서 식습관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선진국의 1인당 물 소비량을 40% 가까이 줄일 수 있다. 고기 섭취를 줄이는 길, 곧 물을 아끼는 길이라는 얘기다.
저자는 소비습관을 바꿔서 사회의 물발자국을 줄이는 방법뿐만 아니라 농부들이 물 생산성을 높여서 식량을 생산하는 일과 공정한 국제 무역 환경을 만드는 일도 '물 안보'를 지키는 데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국제무역에서 불공정한 조건들이 약소국 농업에 가혹한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며 "공정한 국제무역 환경을 조성하는 동시에 세계의 물 안보를 위해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 농부들이 물 생산성을 2배 이상 높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덧붙였다.
-보이지 않는 물 가상수/토니 엘런 지음/동녘사이언스/1만8000원
이상미 기자 ysm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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