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신범수 기자]세계 최대 제약사 화이자(Pfizer,미국)가 영세 복제약 회사에 제품 공급을 요청하는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수년째 계속되는 실적 부진을 만회하기 위한 고육지책이다. 화이자는 2008년 국내 진출 21년만에 첫 적자를 기록했고 업계 1위 자리도 내주는 등 이역만리(異域萬里) 한국 땅에서 굴욕을 겪고 있다.
21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한국화이자는 서울제약과 66억원 규모의 필름형 비아그라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서울제약은 매출액 400억원ㆍ업계 45위권의 소형 제약사로, 비아그라 특허가 만료되자 복제약 '불티스'를 최근 시판했다. 앞으로 화이자는 불티스에 자사 로고를 찍어 국내 판매한다. 화이자가 국내사 완제품을 들여와 자사 브랜드로 판매하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다.
화이자의 효자품목 비아그라는 올 5월 특허연장에 실패하며 복제약 경쟁에 노출됐고 수개월만에 매출이 반토막 났다. 이를 만회하기 위한 방편으로 자사 제품의 복제약을 들여와 팔겠다는 '치욕적' 결정을 내린 것이다. 한국화이자는 국내에 개발ㆍ생산시설이 없어 본사가 신약을 개발해 내려 보내지 않는 이상, 제품군을 확대할 방법이 없다. 앞선 2월 한국화이자는 국내 복제약 시장 진출을 선언하고 LG생명과학과 협력하기로 하는 등 사업 다각화를 꾀하고 있다.
1969년 국내 진출한 화이자는 혁신적 신약을 내세워 한국 시장을 빠르게 잠식했다. 고혈압약 노바스크, 고지혈증약 리피토, 발기부전약 비아그라 등은 해당 질병군에서 독보적 1위였다. 일이 뒤틀리기 시작한 건 2004년이다. 한미약품 등 복제약 회사들이 특허회피 방법으로 노바스크 복제약을 내놓았다. 당시 노바스크는 한국화이자 매출의 절반에 달했다.
결정타는 미국 본사에서 날아왔다. 2006년 사운을 건 신약 '톨세트라핍(torcetrapib)'을 개발 막바지 단계에서 포기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2008년 리피토 특허소송에서도 패해 복제약 시판을 허용했다. 한국화이자는 2008년 국내 진출 21년만에 첫 적자를 기록했고, 한국에 진출한 다국적제약사 1위 자리도 영국계 GSK에 내줬다. 지난해 한국화이자의 매출액은 4527억원, 영업이익 6억원으로 전체 제약사 순위에서 제일약품ㆍ종근당과 비슷한 8위를 기록했다.
화이자는 2009년 백신 기업 와이어스(Wyeth)를 인수하며 반전을 노렸지만 효과는 아직 미미하다. 올해 대대적 약가인하 정책과 비아그라 복제약 출시에 또다시 휘청거리며 한국화이자는 인력 구조조정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본사로부터 신약개발 소식이 없기 때문에 앞날도 불투명하다. 제약업계 관계자는 "화이자가 복제약 시장 미칠 영향을 우려하는 목소리는 많지 않다"며 "기존 제품의 알약 형태를 바꾸는 등 소소한 전략도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이해되나 시장 파급력은 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신범수 기자 ans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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