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정하기 어렵다. 뽀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띄우는 송중기의 외모는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감탄을 자아낸다. KBS <성균관 스캔들>에서 유유자적한 선비를 연기할 때나, MBC <트리플>에서 스케이트 선수복을 입을 때, 심지어 SBS <산부인과>에서 가운을 입은 의사 역을 맡았을 때도 그의 얼굴은 언제나 대중들에게 가장 먼저 드러나는 그의 재능이었다. 그러나 송중기만은, 자신의 외모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SBS <뿌리깊은 나무>에서 아역이라는 핸디캡을 기꺼이 감수하고도 어린 세종에 도전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해사한 얼굴을 무기로 쓰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편안한 웃음 대신 두려움과 고뇌를 새겨 넣은 그의 얼굴과 능글맞은 농담을 지워버린 그의 목소리는 청춘스타로 빛나려는 이 청년을 한 발자국씩 배우의 세상으로 이끌어 나갔다. “지금 와서 그 당시의 선택을 생각하면, 아이고 중기야 잘했어, 하고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어요. 하지만 제가 잘한 것 보다는 대본의 힘이 훨씬 크다고 생각하거든요”라고 의젓하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세상 말이다.
<늑대소년>은 그런 송중기의 지향과 그가 타고난 재능을 원하는 대중의 요구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결합한 영화다. 영화는 늑대의 습성과 초인적인 힘을 가진 소년의 정체를 완벽하게 설명해내지 못하지만, 결국 소년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온도만큼은 완전하게 달구어 낸다. 이 과정에서 얼굴에 온통 검댕을 묻히고 손으로 음식을 퍼먹는 송중기의 모습은 흰 우유 같은 그의 판타지를 폐기해 버리지만, 언어와 관습을 초월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의 연기는 이 젊은 배우에게 새로운 환상을 갖게 만들고야 만다. 하지만 송중기는 자신이 지어 올린 소년의 집에 오래 머무르지 않을 예정이다. “소년 송중기에게 안녕을 고하는 마음으로 선택한 작품이었어요. 이제는 나이도 있고, 남자가 되어야 할 것 같아요. ‘착한남자’의 시간이 된 거죠.” 그가 선택한 다섯 편의 영화에서 송중기의 미래에 대한 어렴풋한 밑그림을 짐작하게 되는 건, 그래서다. 더 이상 소년이 아닌 이 남자가 보고 또 보아 온 남자들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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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을 놓치다> (Lost In Love)
2006년 | 추창민
“한국 멜로 영화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을 꼽으라면, 당연히 <사랑을 놓치다>입니다. 오래 전에 어긋났던 남자와 여자가 다시 만나서 마음을 열기까지 실수를 반복하고 망설이는 내용이라 사실 특별한 사건이나 장치가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잔잔한 이야기를 기가 막히게 살려내는 두 배우의 연기를 보고 있으면 진짜 공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너무 좋아하는 영화라서 반복해서 보기도 했는데, 그 섬세한 호흡이 볼 때마다 말 할 수 없이 좋더라고요.”
세상에서 가장 절절한 멜로는 다름 아닌 자신의 사랑 이야기다. 대중의 경험이 가진 공통분모를 가장 적절하게 뽑아낸 <사랑을 놓치다>는 그래서 지극히 일상적인 장면들로 관객들이 특별한 추억에 젖어들게 한다. 주연배우인 설경구와 송윤아는 이 작품을 함께 촬영한 이후 결혼을 발표해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 연출을 맡은 추창민 감독은 2012년 <광해, 왕이 된 남자>를 통해 다시 한 번 대중적 감각을 표현하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음을 증명하기도 했다.
2. <연애의 목적> (Purpose Of Love)
2005년 | 한재림
“제목에 ‘연애’라고 버젓이 나와 있지만, 사실 멜로와는 거리가 먼 영화죠. 영화 속의 남자 주인공은 사실 본받고 싶은 인물은 결코 아닌데, 그걸 밉지 않게 연기 해 낸 박해일 선배님의 연기만큼은 정말 배울 점이 많았어요. 그 캐릭터에 얼마나 빠져 있었는지, 데뷔 전에 오디션을 한창 보러 다닐 때는 <연애의 목적>에 나온 모든 대사를 다 외우고 있을 정도였어요. 오디션에서 막 대사 연기를 보여드리기도 했었죠.”
전형적인 연애 사건 안에서 전혀 뻔하지 않은 캐릭터들을 그려내는 <연애의 목적>은 주연배우인 박해일과 강혜정의 필모그래피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작품이다. 권력 구도라는 추상적인 주제를 로맨스로 풀어내는 시나리오의 영민함과 블랙 코미디를 다루는 연출의 세련됨이 좋은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대종상, 청룡영화상 등 다수의 영화 시상식에서 신인 감독상과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3. <비열한 거리> (A Dirty Carnival)
2006년 | 유하
“사실 유쾌하고 말랑한 영화들 보다는 느와르 영화를 참 좋아하는 편입니다. 데뷔 무렵부터 항상 느와르 작품에 출연하기를 꿈꿔 올 정도였어요. 그 중에서도 <비열한 거리>는 한국 느와르 영화중에서 최고라고 생각해요. 뭐라고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작품을 좋아하는데, 제 또래의 한국 남자들 중에 이 영화에 반하지 않은 사람은 몇 안 될 거라고 생각해요. <쌍화점>을 촬영하면서 조인성 선배님께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지만, 이 영화를 볼 때는 관객의 입장에서 조인성 선배님을 좋아하게 된다니까요.”
배신과 협잡, 사랑과 우정, 행운과 의리까지, <비열한 거리>는 느와르 영화에 필요한 대부분의 요소로 만들어진 영화다. 여기에 짧은 머리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트로트까지 열창하는 조인성의 연기 변신으로 남성 관객들은 물론, 여성들에게도 반향을 불러일으킨 작품이기도 하다. 또한 조인성은 이 작품으로 대한민국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커리어의 전환점을 맞이하기도 했다.
4. <공동경비구역 JSA> (Joint Security Area)
2000년 | 박찬욱
“원래 전쟁영화를 좋아하는 편이기도 하지만, <공동경비구역 JSA>는 단지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거나 액션으로 승부를 하기보다는 의외의 메시지는 전달하는 점이 새로워서 참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늑대소년>이 의외로 늑대인간보다는 멜로가 중요한 영화인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영화에서 이병헌 선배님이 보여주시는 연기는 그냥 ‘최고’라고 표현 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박찬욱 감독의 출세작인 <공동경비구역 JSA>는 돌이켜 보면 흥행 결과가 의아할 정도로 복잡하고 첨예한 작품이다. 미스테리의 구조 안에 남북문제를 부려놓고, 궁극적으로는 휴머니즘을 이야기 하는데, 오락 영화로서의 유머감각을 잃지 않은 점이 유효했다. 다수의 작품상, 감독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것은 물론 신하균이 청룡영화상의 남우조연상을 수상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한 작품이기도 하다.
5. <살인의 추억> (Memories Of Murder)
2003년 | 봉준호
“저는 기본적으로 스릴이나 긴장 상태를 좀 즐기는 편인데, 그래서 영화도 예상을 벗어나는 지점에 반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살인의 추억>은 그런 점에서 아예 한국영화답지 않은 놀라움이 있는 작품이었어요. 좋아하는 영화는 자주 반복해서 보는 편인데, 볼 때마다 새롭게 감탄을 하게 될 정도거든요. 봉준호 감독님의 연출도 정말 대단하지만, 배우 분들의 연기도 하나같이 놀라울 정도죠. 그 에너지와 치열함이 배우로서 부러울 정도입니다.”
의뭉스럽고 능청스러운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 중에서 <살인의 추억>은 충돌의 에너지를 가장 본격적으로 활용하는 작품이다. 두 형사의 상반된 캐릭터는 시종일관 대립하고, 범인을 잡겠다는 영화의 의지는 디테일하게 복원된 현실에 계속해서 부딪힌다. 그리고 용의자인 박해일과 송강호가 마주하는 장면에서 영화가 보여주는 콘트라스트의 미학은 정점에 도달하는데, 이 장면의 대사 “밥은 먹고 다니냐”는 이후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할 만큼의 인상을 남기는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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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에서 남자로, 이름을 바꿔 달았지만 사실 변화란 그렇게 칼로 동강을 내듯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송중기는 누구보다 변화와 발전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게다가 스스로를 ‘상업배우’라고 규정짓는 이 젊은 배우는 조급해하지 않고 시간의 뜻에 제 운명을 맡길 마음의 준비가 단단히 되어 있다고 말한다. “빨간색에서 곧장 검은색으로 가려고 하면, 그게 망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해요. 서서히 조금씩 원하는 색으로 물들어 가야 하는 거죠. 지금 당장은 대중이 외면하고 거부하는 선택을 할 용기가 없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진짜로 제가 꽂힌 것을 곧장 선택할 수 있을 내공과 신뢰가 쌓이겠죠. 마치 안성기 선배님처럼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지켜보며 기다려야 송중기의 완성형을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소년에서 남자로, 다시 배우로 변화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그를 기다리는 일이 지루하지 않겠다는 예감만큼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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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윤희성 nine@
10 아시아 사진. 채기원 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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