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10.26 박정희 대통령 쓰러진 자리… '무궁화동산' 만들어 일반에 개방
[아시아경제 나석윤 기자] 10월 26일, 이날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요동치게 한 총성이 70년의 시차를 두고 울렸다.
첫 번째 총성은 1909년 하얼빈 역이었다. 이날 이곳에서 대한제국 통감부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안중근 의사가 쏜 총에 숨을 거뒀다. 당시 이토는 5개 국어를 구사하는 일본 내 최고 엘리트였다.
안 의사의 총에 쓰러진 이토가 "누구냐?"라고 물은 후 조선인이라는 답을 듣자 "빠가야로!"를 외친 뒤 숨을 거뒀다는 일화는 잘 알려진 비하인드 스토리다.
그리고 70년 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부'를 겨냥한 총성은 유신독재를 종식시켰다. 안중근의 10.26 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피살된 '10.26 사태'다.
당시 종로구 궁정동 청와대 부지 내 중앙정보부 한 안전가옥(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쓰러졌다. 1961년 5월 군사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후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그의 18년 철권통치가 무너지던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33년 전 10월 26일 총성이 울렸던 그곳의 현재 모습은 어떨까? 현직 대통령에게 가장 신임했던 심복 중 한 명이 총부리를 겨눈 긴박했던 순간이 무색할 정도로 일대는 평온한 모습이다.
서울 종로구 궁정동 55-3번지, 북악산을 바라보며 청와대와 경복궁 사이 왼쪽에 자리한 궁정동의 안가는 궁정동에 있었던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는 별도의 건물을 말한다.
여기에는 중앙정보부 궁정동 본관과 부장 집무실 그리고 대통령이 사용하는 구관의 가~다동(한옥)이 있었다. 구관에서는 주로 대통령의 크고 작은 저녁 연회가 열리기도 했다.
중앙정보부의 안가는 이곳 이외에도 서울 청운동, 한남동, 삼청동 등에 5~6곳이 더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유신독재 종식 후에도 오랫동안 출입이 금지됐던 이 곳엔 지난 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 이후 '무궁화동산'이 조성돼 일반에 개방됐다.
7933㎡ 규모에 뿌리내린 나무만 소나무 외 29종 3만2000여주.
동산은 청와대 앞 사랑채 맞은 편에 조그만 규모로 조성돼 있다. 벤치와 정자, 음수대, 가로등 등 대부분의 것들이 소소한 모습이다.
따사로운 가을햇살이 곳곳을 감싸는 가운데 붉게, 노랗게 옷을 갈아입은 나뭇잎들이 바람에 나부낀다. 사랑채 분수 주변이 외국인관광객들로 분주한 반면 바로 길 건너 편인 동산은 산책 나온 몇몇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제외하면 한산한 모습이다.
서슬퍼런 정보기관의 음험한 밀실이었던 이곳이 소박한 공원으로 탈바꿈한 풍경은 한국 현대사의 굴곡과 함께 민주화의 성취가 시민의 일상으로 나타나 있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 증언이라도 하듯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지도자들과 관련한 기념비와 식수가 공원 한 켠에 자리하고 있다.
동산 입구에 들어서면 개원을 맞아 세운 작은 기념비를 만날 수 있다. 기념비에는 동산의 조성배경과 청와대 앞 공간을 개방하면서 희망했던 김 전 대통령의 바람이 새겨 있다.
'이 공원은 김영삼 대통령께서 청와대는 국민과 더불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만들고자 하신 뜻을 받들어 안가를 헐어내고 조성한 것'이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아울러 동산을 일컬어 '청와대를 찾는 모든 이들의 쉼터'로 지칭하고 있다. 비석 내용은 이원종 전 서울시장이 옮겨 담았다.
입구를 지나 바로 왼쪽으로는 1999년 식목일을 맞아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심은 한 그루의 소나무가 서 있다. 어느덧 10살을 훌쩍 넘어선 나무의 높이가 족히 2m는 돼 보인다.
소나무 바로 아래 조그맣게 만들어진 비석에는 '김대중 대통령, 이희호 여사 기념식수'라는 문구가 시민들을 맞고 있다.
그리고 동산의 정중앙에는 궁정동을 상징하는 우물 정(井)자 모양의 분수대가 놓여 있다.
조금 더 걷다 보면 돌담과 함께 청음(淸陰) 김상헌 선생의 집터 표석과 시비(詩碑)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은 조선시대 도승지와 육조판서, 대사헌 등을 지낸 청음의 생가가 자리하던 곳이다.
또한 박 전 대통령이 숨을 거둔 것으로 알려진 안가가 있던 터이기도 하다. 지금의 평범함과는 달리 역사적 인물들의 생사가 오갔던 현장인 셈이다.
청음은 조선조 인조 14년(1636) 발발한 병자호란에서 청나라와 화의를 맺고자 하는 조정 방침에 끝까지 맞선 3학사 중 한 명이다. 비석에는 청음이 인조 18년(1640) 12월 9일 척화를 주도한 인물로 지목돼 심양으로 잡혀가던 중 읊었다는 시조의 내용도 소개돼 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라는 시조에선 옥살이를 떠나며 고향땅과 이별하는 청음의 비통한 심정이 드러나 있다.
무궁화동산과 100여m 떨어진 대경빌라 D동 입구 사이엔 최규식 경무관과 정종수 경사의 순국을 기리는 비석과 당시 상황을 일러주는 안내판도 볼 수 있다.
중앙정보부 건물이 있었던 곳으로 알려진 대경빌라와 무궁화동산의 꼭 중간 지점이다. 현재 빌라와 바로 옆 청와대 부지는 높은 담벼락과 윤형 철조망으로 구분돼 있는 상태다.
1968년 1월 21일 당시 종로경찰서장으로 재직하던 최 경무관은 청와대 기습을 위해 남침한 김신조 등 무장공비 31명과 맞서다 순직했다.
최 경무관은 교전 도중 가슴과 복부 등에 관통상을 입고서도 '청와대를 사수하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정 경사 역시 최 경무관과 함께 현장교전 도중 목숨을 잃었다.
비석에는 '북한 무장공비 침투 저지한 곳'이라는 문구와 '최규식 경무관과 정종수 경사가 육탄으로 저지하여 순국한 곳'이라는 구절이 새겨져 있다.
세월의 흐름 탓일까 무궁화동산에서 옛 중앙정보부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을 쥐락펴락하며 간담을 서늘케 했던 곳이라기엔 시민들의 왕래도 자유로웠다.
박 전 대통령이 피살됐던 역사적 현장에는 돌담과 표석, 시비가 그리고 옆으로는 조그마한 정자와 운동기구들이 놓였다. 질서정연하게 정돈된 공원길과 나무들에 동산을 찾은 시민들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둘렀다.
지상에서 가장 안전하리라 믿었던 '안전가옥'이었지만 민심으로부터 멀어진 권력자에게는 겹겹의 철통보안조차 '안전'을 전혀 보장할 수 없었다. 궁정동 안가가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에게 던지는 교훈이다.
나석윤 기자 seokyun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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