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물류 중심, 귀한 소금 집산지 고기 양념하기 쉬웠던 곳
토정 이지함이 상업에 뛰어들며 '경강상인'을 키워내고
北에는 산 南에는 한강, 그 절경에 시문 읊던 정자가 30여개
뱃길 대신 마포대교 강변북로로...그 시절 기억하는 상권
[아시아경제 김종수 기자, 박나영 기자]가을이다. 추수를 마치고 곳간 가득히 쌓이는 곡식만큼이나 마음이 풍성해 지는 계절이다. 글을 가깝게 하고 모두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여유도 생긴다.
등화가친(燈火可親)이 가을을 얘기하고 문화행사가 이 시기에 집중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경기침체와 빠듯한 살림살이에 이래저래 걱정이 많은 때이지만 그래도 가을이다.
지난 12일 오후 선선한 가을바람을 따라 무작정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강바람이나 쐬야겠다는 욕심에 5호선 마포역에서 내렸다. 날씨에 따라 강변 풍광이 달라보이는게 늘 신기했던 곳이다. 특히 북쪽의 산들과 남쪽의 한강을 배경으로 절경을 자랑한다.
그래서일까. 풍류시객과 중국 사신들이 경치를 조망하며 시문을 읊던 정자(亭子)가 서강 지역만 30여개가 넘었으며 전하는 시문(詩文)도 50여수나 된다고 한다.
◆조선의 모든 물류가 모이던 곳, 마포나루 = 500년전 조선의 수도 한양. 상업을 천시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명문가 출신의 선비가 직접 배를 타고 상행위를 했다면 믿어질까?
조선 중기의 학자 이지함은 마포나루의 역동적인 모습이야말로 조선을 이끌어갈 힘이라고 생각했다. 대대로 경강(한강의 옛 명칭)변에 터를 잡고 살아온 이곳의 상인들은 고기 잡는 기술 뿐만 아니라 장사 수완도 뛰어났다.
이지함은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장사를 시작했다. 선주들에게 곡식과 배를 빌리고, 항해술이 뛰어난 어부를 골라 배에 태워 직접 선단을 이끌었다. 그는 조선 최초의 양반 상인이었다.
이지함은 또 행상이 생업으로서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라는 점을 설파하고, 실제 행상을 할 수 있도록 경강변 유민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덕분에 자신감을 얻게 된 경강변 유민들은 장사꾼이 돼 이 마을 저 마을로 물건을 팔러 다녔다.
18세기 후반, 이지함의 영향을 받은 상인과 일반 백성은 '경강상인'이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그 중에서도 크게 성공한 상인들은 '강상대고'라 불리며 조선경제의 주역으로 떠올랐다.
강상대고의 성장과 함께 경강변은 한양 최대의 도매시장이 됐다. 특히 마포나루에는 어염전(생선 및 소금), 미전(쌀), 칠목전(옷칠), 잡물전(생필품) 등이 가득 메웠다.
그러나 20세기 들어 쇠락의 길을 걸었다. 서양 열강이 조선을 넘보기 시작한 것이다. 마포나루 역시 고유의 기능을 잃고 빛을 잃어갔다. 더불어 강상대고의 운명 또한 저물어갔다.
◆깊어가는 가을, 뿌리깊은 상인문화 = 옛 마포나루의 상권은 지금의 서울 마포구 도화동, 용강동 일대로 이어진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육로 운송의 발달과 마포대교의 건설 등으로 조금씩 쇠퇴해 갔지만 여전히 수많은 상인들이 이곳에서 삶을 꾸리고 있다.
경강상인의 후예들은 이곳의 역사를 짠맛의 감각으로 기억하고 있다. 전성기 마포나루에는 곡식, 목재, 어물 등 다양한 물자들이 전국에서 올라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했던 것이 바로 소금이었다. 마포나루에서 소금이 날 리도 없건만 조선시대 마포나루에서 거래되던 소금은 '마포염'이라고 할 정도로 유명했다. 질 좋은 소금이 모이는 곳이다보니 더불어 젓갈의 명성도 높았다.
이곳 토박이인 김기순(80·여)씨는 "불교방송에서부터 서울가든호텔 있는 데까지 새우젓 파는 데가 양쪽으로 쫙 있었다"면서 "소금도 팔고 새우적 비린내가 진동했다"고 회상했다.
이 때문일까. 이곳은 마포주물럭, 마포갈비 등 고기가 유명하다. 소금은 이들 고기의 기본양념이다.
직장인 권기현(42·남)씨는 "마포는 교통편, 먹을거리 등을 감안하면 직장 생활하기 아주 좋은 동네"라며 "특히 주물럭, 갈매기살 등 퇴근길 소주 한잔 꺾고 가기엔 제격"이라고 말했다.
또한 경강상인들에 의해 유통되는 미곡은 '강미' 또는 '강상미'로 따로 불릴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이로 인해 마포나루 인근에는 창고가 많았다. 일제시대에는 근대식 정미소와 쌀창고가 새롭게 들어섰다.
한국전쟁과 근대화로 인해 그 흔적은 대부분 사라졌는데, 유일하게 용강동에 쌀창고 건물이 하나 남아있다. M팰리스웨딩홀 옆골목에 위치한 '맹씨네 숯불갈비'가 그 곳이다.
이 식당 종업원은 "여기가 원래 쌀창고 였는데, 이를 기억하고 고향에 왔다고 말하는 손님들도 있다"면서 "이 옆의 웨딩홀은 예전에는 정미소였다"고 설명했다.
17세기 중엽 마포나루는 수많은 사람이 드나들면서 조선 최초의 여객주인업이 탄생한 곳이기도 하다.
초기의 여객주인업은 각지에서 몰려드는 상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거나 물건을 맡아주는 등의 일을 했다. 그러다 상인들을 대신해 물건을 팔아주는 선(先)판매와 창고업, 중개업, 금융업 등 상행위와 관련된 활동을 종합적으로 운영하는 주요 상인으로 부상했다.
경제체계가 현대적으로 바뀐 지금, 여객주인업은 유통업으로 녹아들었고 주막 대신 여관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마포역 4번 출구로 나와 골목길로 들어서면 '동림여관'이 있다. 50년이 넘도록 이곳을 지켜온 터줏대감이다. 이 여관에서 일하는 한 종업원은 "요즘도 꾸준히 손님들이 찾고 있다"면서 "주로 여행객이나 인근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이라고 말했다.
◆불씨 되살리는 강상대고의 후예들 = 마포나루는 사람을 불러들이는 묘한 힘을 지녔다. 사람들은 옛날의 뱃길 대신에 마포대교와 강변북로를 따라 마포로 들어온다. 어제의 뱃사공 대신에 전국의 맛 탐방객들이 이곳을 찾는다.
비릿한 생선 냄새로 가득했던 곳에선 고기 굽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사람들은 둥그렇게 둘러앉아 숯불을 피우며 일상의 고단함과 삶의 희로애락을 굽는다. 역사책 속에서 보았던 우리 역사의 현장이 지금 우리 곁에서 함께 숨 쉬고 있는 것 같다.
박홍섭 마포구청장은 "마포나루는 한강변 상인들이 지역 상인들을 하나로 묶고 인간중심의 문화를 펼쳤던 강상대고의 정신이 살아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과거 조선시대 경제중심지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발전시키면 미래의 마포나루는 전 세계에 한국의 문화와 전통의 맛이 살아있는 음식문화 상권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마포는 다시 흥성하고 있다. 경강상인들의 후예들이 더 나은 상권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마포나루가 상인들을 길러 냈다면, 이제는 상인들이 지금의 마포를 되살리고 있다.
김종수 기자 kjs333@
박나영 기자 boh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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