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속에서 나는 죽었으므로 나는 기억의 고인이다. 내 앞에 국화꽃 한 송이 놓여있지 않으므로 나는 그냥 이름없이 허물어진 무덤이다. 흙으로 물로 바람으로 지나치면서 켕기는 것이 없는 무연고 묘지다. 지금이 아니라면 나는 무덤에서 걸어나와 아무 일 없었던 듯이 오래 키스하고 있을텐데 당신은 어디 가고 나는 어디 가고 기억은 어디 가고 기억하지 못하는 그 시간은 어디 가고 나만 남았는가 빛나는 해골만 하얗게 닦여 그저 대체할 수 없는 사물로만 남았는가 국화꽃 한 송이 놓여있지 않으므로 그 향기가 오래도록 경계를 떠돈다 입도 없는 사랑아 말 좀 해보라
이빈섬의 '기억의 고인(故人)'
■ 삶의 많은 모양새들은 죽음의 리허설이다. 기억이 사라지는 것도 비슷한 일이다. 절연이나 절필같은 것도 그렇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 그 일회성과 불가역성 앞에서, 우린 죽음의 냄새를 맡는다. 오래 전 좋아했던 사람을 만났을 때, 그에게로 도착할 수 없는 발송실패의 메일들이 그와 나 사이의 투명한 벽에 잔뜩 붙어있음을 알았을 때, 벽을 기어오르고 싶을 만큼 슬펐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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