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현장의 전투화를 팔겠습니다.” 정규직 전환을 위한 개인 프레젠테이션에서 장그래는 팀 프레젠테이션을 함께 했던 한석률에게 슬리퍼를 건네며 말했다. 현재 포털 다음에 연재 중인 웹툰 <미생>의 이 장면은, 말하자면 지금도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는 샐러리맨의 치열함을 위한 헌사와도 같다. <미생>은 회사 안에서 벌어지는 최대치의 갈등을 만들어내기 때문이 아니라 회사의 평온하고 지루해 보이는 일상이 실제로는 얼마나 전쟁 같은지 명확하게 잡아낸다. 한국 현대사의 부조리한 현장들을 분노에 가득 찬 시선으로 풀어냈던 <야후>, 역시 근현대사의 모순과 인간의 괴물 같은 욕망이 가득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스릴러 <이끼>, 정계와 매체, 검경의 유착을 치밀하게 그리는 <내부자들> 등 선 굵은 걸작을 만들어온 윤태호 작가의 세계에서도 유독 <미생>의 위치가 흥미로운 건 그래서다. 태풍 볼라벤 같은 스케일을 쫓기보다는 찻잔 속의 태풍에 현미경을 대는 작가의 시선을 통해 비로소 우리의 평범한 삶의 무게는 온전히 드러날 수 있었다. 과연 이 탁월한 작품은 어떤 과정을 통해 우리 앞에 등장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작가 윤태호는 무엇을 발견하고 느꼈을까. 작품에서 시작해 인간으로 끝난 그와의 대화다.
<#10LOGO#> 포털 다음에 연재 중인 <미생>이 책으로 출판됐다. 다른 작품과 달리 연재부터 출판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작품이다.
윤태호: 시작하게 된 계기도 좀 독특하다. <이끼>가 영화로 나올 즈음 MBC <문화산책>에서 3일 정도 나를 취재했는데 편집자와 회의하는 것도 찍고 싶다고 해서 당시 출판 제안을 했던 위즈덤하우스 측과 첫 미팅하는 장면을 찍었다. 그쪽 편집자 분이 방송을 부담스러했는데 그게 너무 미안해서 제대로 듣지도 않고 오케이를 해버렸다. (웃음) 바둑과 샐러리맨, 두 가지 모두 자신 없는 소재여서 계약했던 분량인 4권을 빨리 해치워버리고 다음 작품을 잘하자고 생각했다.
<#10LOGO#> 내 작품이라는 생각이 아니었던 건가.
윤태호: 우선 <이끼>라는 자극적인 작품을 그려놓고서 바둑과 샐러리맨에 대한 걸 쓰자니 둘 사이를 이을 게 없는 거다. 특히 가장 힘든 건, 출판사에서 나에게 뭘 기대하는지 파악하는 거였다. 처음에는 위기십결이라는 바둑에서의 십계명을 가지고 바둑 고수가 세상 사람에게 일갈하는 이야기를 요청했는데 말하자면 처세술에 대한 거였다. 그런데 나는 고수가 나오는 걸 싫어한다. 그리고 당장 나보다 많이 배운 샐러리맨들에게 내가 뭘 가르치겠나.
<#10LOGO#> 그럼 이야기의 방향을 잡을 때까지 오래 걸렸을 텐데.
윤태호: 나는 샐러리맨의 생활을 잘 모르지 않나. 그 사람들은 항상 술집 가서 상사 욕하고 회사 욕하는데 그러면서 왜 그렇게 열심히 다닐까, 그런 궁금증이 있었다. 그래서 샐러리맨들이 자주 가는 커뮤니티에서 보면 다들 사소한 영역에서 화를 내더라. 가령 나는 이 물건을 항상 여기에 두는데 누군가 허락 없이 그 물건을 쓰고 제자리에 안 두면 화나는 거다. 저 놈도 배울 만큼 배운 놈인데 왜 이렇게 할까, 다른 의도가 있나, 나를 무시하는 건가. 그런 걸 보며 재미의 포인트를 낮은 곳에서부터 출발하자고 생각했다. 작은 일도 이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로 만들자고. 그래야 내가 힘들지 않을 거 같았다. 주인공 장그래도 바둑만 두다가 샐러리맨이 된 사람이라 이 세계를 잘 모를 거 아닌가. 그 작은 범주 안에서 디테일을 잡기로 했다. 그렇게 출판사의 가이드를 극복하는데 3년이 걸렸다. 이건 내 일이라고 여기기까지.
“사무직은 일도 없어 보이는데 왜 야근하느냐 물었다”
<#10LOGO#> 회의 내용을 무역 용어로 짧게 줄이는 에피소드에서 그런 작은 범주에서의 디테일이 잘 드러났다. 결국 취재의 힘일 텐데.
윤태호: 종합상사 취재를 요청했을 땐 다 거절을 당해서 연재 전 3년 동안은 한국 기원에서 바둑만 취재를 했다. 그러다 어찌어찌 회사원 분들을 알게 됐는데 3회 정도 연재되었을 때부터 이분들에게 샐러리맨 세계를 배웠다. 취재라기보다는 스터디지. 내가 보기에 사무직은 그냥 마우스 딸깍딸깍 하면서 하는 일도 별로 없어 보이는데 왜 야근을 하느냐고 물으면 “작가님, 제가 기획서라는 걸 씁니다. 저한테 2011년 11월 데이터가 있으면 이보다 더 최근 버전이 있나 아는 사이트를 다 돌아다니며 확인을 합니다. 아는 사람 통해서 물어보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바로 정보가 오진 않습니다. 기다리고 있으면 회의 들어오라고 하고 그러면 또 회의 준비를 새로 해야 합니다”라고 하나하나 다 가르쳐준다. 지금도 한 달에 한 두 번씩 만나 취재를 하고 대사 하나 안 풀리면 문자로 새벽에도 물어본다. 무역 용어 에피소드 같은 경우는 내가 장그래에게 큰 벽을 하나 주고 싶었고 그게 언어의 문제일 거 같아 취재원 분에게 풀어쓴 문장과 확 다이어트 된 문장을 부탁드렸다. 일주일 동안 고민해서 두 문장을 주셨고, 나 스스로 세 줄짜리 문장이 한 줄이 되는 과정을 직접 검색을 해가며 따라갔다.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 중 하나다. 성취감이 있었으니까.
<#10LOGO#> 샐러리맨의 생활이 스토리로서 재밌다는 확신이 들면서 작품에 대한 의지가 생긴 걸까.
윤태호: 재미로 접근하진 않았다. 우선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은 직업군 아닌가. 그런데 이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힘들고 어려움을 겪는지 디테일하게 묘사한 작품이 별로 없었다. 이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이야기를 멋지게, 힘낼 수 있도록 묘사하고 싶은 게 컸다.
<#10LOGO#> 혹 안티텍스트로 삼은 게 있나.
윤태호: 그럴 것 없이 지금까지 나온 대부분의 창작물이 뉘앙스만 담아내지 디테일한 묘사는 없던 것 같다. 드라마 보면 같은 회사 안에 나쁜 놈이 많이 있는데 실제로 그렇게 나쁜 놈들이 많이 있을까 싶기도 했고. 그냥 나는 이들의 건강함만 증명해도 재밌는 에피소드가 충분할 거라고 봤다. 가령 옛날 일본 스포츠 만화를 보면 적이 안 나와도 그냥 어떤 지향점을 향해 노력하는 과정만으로도 재밌고 감동을 줬다. 스스로의 좌절이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되는 거고. 댓글 보면 ‘이런 회사 없습니다’, ‘오 과장 같은 상사 없습니다’ 라고 하는데 우선은 그런 기조다. 다만 취재 중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부류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 최근 에피소드에서 박 과장이라는 나쁜 놈을 넣었는데, 작품 자체가 장그래의 업무 이해도에 따라 흘러가는 만큼 이 시점에서 만날 만한 악인을 만들었다.
<#10LOGO#> 합리적인 오 과장부터 최근 나온 악당인 박 과장 등 여러 디테일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캐릭터 설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어떤 건가.
윤태호: 만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만화에 이로워야 하기 때문에 작품이 가고자 하는 방향의 요소로서 존재해야 한다. 취재원 중 매우 개성이 뛰어난 사람이 있어서 이 사람을 묘사해보겠다고 하는 게 아니다. 각 인물이 작품의 원소가 되어야 하니까.
“아내가 이제야 불안해보이지 않는다더라”
<#10LOGO#> 그렇게 캐릭터가 잡히면 스토리가 스스로 움직이는 지점이 있을까.
윤태호: 결국 대사를 쓰는 건, 이 캐릭터는 이런 사람이라는 약속이 되는 거다. 얘는 이렇게 가야해. 그러니까 갈등이 생기는 거다. 오 과장이나 김 대리는 술도 잘 안 먹고 굉장히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로 약속이 됐기 때문에 이쪽 팀에 오기로 한 박 과장이 업무 시간에 당구장에 있는 모습만 비춰줘도 독자들은 긴장한다. 그래서 캐릭터를 많이 노출해주는 게 유리하다. 나는 플롯을 많이 잡지 않는 편이다. 주인공이 비약해서 도달할 징검다리만 준비하고 그때그때 에피소드는 그때 고민한다. 그 즈음에 주인공은 무엇을 고민해야 할지 어떤 성취를 할지 이런 것들.
<#10LOGO#> 그런 비약의 원동력 역시 캐릭터 안에 심어져야 할 텐데 장그래의 강점은 무엇일까.
윤태호: 이 사람은 어릴 때부터 바둑을 두고 나면 복기해왔다. 전국 바둑 영재가 다 모이는 한국 기원 연구생으로서. 프로가 되느냐 못 되느냐, 이것만 보면서 계속 승수를 쌓아야 하는데, 이런 과정 속에서 단단해지고 무심해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살았을까. 장그래는 자기 앞에 거울을 놓고 평생 그걸 보고 살 거다. 중계가 된다는 전제로 바둑을 두는 만큼 자기객관화가 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직업군 같다.
<#10LOGO#> 바둑 역시 <미생>의 한 축인데, 3년 동안 바둑 관련 취재를 하며 꼭 작품에 담아내고 싶은 게 있었나.
윤태호: 바둑 관련 에세이 읽는 걸 좋아했는데, 그 중 ‘바둑은 전체가 부분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즉 바둑판이 둥글었다면, 361로가 아니었다면 바둑의 양상이 달라졌을 거라는 거다. 우리 삶도 우리가 지구에, 대한민국에, 서울에 있어서 결정되는 게 있지 않나. 그런 걸 그리고 싶었다.
<#10LOGO#> 그런 면에서 <미생> 속 회사 안에서 동시대 한국의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을 텐데.
윤태호: 결국 주인공의 눈을 통해 주변을 보는 건데, 후반부에 가면 결국 그런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까. 열심히 일을 해서 정말 몇 백억 단위의 프로젝트를 성사하면 그 이익이 회사로 가는데 과연 그게 직원들에게 잘 배분이 되느냐. 경영합리화의 가장 쉬운 방법이 결국 인건비 줄이는 건데 그에 대해 장그래는 질문을 할 거 같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여준 오 과장, 김 대리 같은 성품의 사람이라면 그 질문에 말문이 막히겠지.
<#10LOGO#> 앞서 샐러리맨들을 응원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도 했는데, 재미를 추구하는 것과 동시대를 이야기하는 것 중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나.
윤태호: 나는 <이끼> 전에 그리 재밌는 작가가 아니었다. 개그를 해도 혼자 키득거리고 조소하는 유머 코드였고. <야후>도 유쾌한 작품은 아니지 않나. <이끼>를 할 땐 3년 정도 슬럼프가 있던 시기라 다른 무엇보다 내가 가장 잘 묘사할 수 있는 걸 하려고 한 거다. 내가 재밌다고 생각하는 걸 했지, 남들이 재밌게 여길 만한 걸 보여주겠다거나 시대를 묘사하겠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일하진 않았다. 지금 <미생>을 연재하면서 아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이제야 불안해보이지 않는다더라. 나도 이제야 안정되게 상업 작가로서 보편적인 재미의 만화를 그리게 된 거 같고. 이제는 내 감정을 강요하지 않고 좀 더 쿨 하게 표현하고 싶다. 가령 주호민처럼. <무한동력>은 정말 덤덤하게 그려내지 않나. 나는 그 나이에 피로 떡칠 된 <야후> 같은 만화를 그렸는데 이 녀석은 어찌 그리 똘똘한지. (웃음) 독자는 울지언정 나와 캐릭터는 울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생>에서 영업 3팀이 고사를 지내는 장면에서 비가 내렸는데 그게 말하자면 울음 대신이었지. 여기까지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한다.
“인물에 대한 통찰이 가장 뛰어난 작품은 <슬램덩크>”
<#10LOGO#> 지금 만화를 연재하는 사람으로서, 작가로서 성장하는 만큼 출판에서 웹툰으로의 플랫폼에 익숙해지는 과정도 필요했을 텐데.
윤태호: 출판 만화는 넘기면 뭐가 나올지 기대하고 다시 이해하고 기대하는 그런 리듬이 있었는데 웹툰은 스크롤을 주욱 내리니까 그 리듬이 다르다. 첫 웹툰이 <첩보대작전>이었는데 1회 콘티를 강풀, 강도하, 양영순한테 보여줬더니 (양)영순이가 “아, 형 이건 아니지” 하더라. 그나마 <첩보대작전>은 개그물이니까 개그 코드만 맞으면 되는데 <이끼>를 그릴 땐 정말 불안했지. 호흡이 괜찮나, 빠른 건 아닌가. 그러다 10회 넘어 김덕천이 류해국 창을 몰래 보다가 자동감지 센서로 등이 켜지는 장면이 예상대로 연출되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10LOGO#> 현재 세종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런 연출적인 부분들도 가르치나.
윤태호: 세종대는 오히려 이두호 선생님과 이현세 선생님이 원고지로 작업하는 훈련을 많이 시켜서 출판 만화를 많이 지향하는 편이다. 스크롤 방식을 잘하는 사람이 출판 만화 연출로 넘어가기는 어려운데 그 반대는 좀 더 쉬운 편이니까. 하지만 내가 강조하는 건, 스스로 웹툰 작가 혹은 출판 작가로 규정하지 말라는 거다. 너희는 창작자고, 그 때 가장 좋은 지면에 작품을 내면 된다고 말한다.
<#10LOGO#> 그렇다면 그 때 가장 좋은 지면에 낼 수 있는 창작자로서의 힘은 무엇이라 가르치나.
윤태호: 가장 중요한 건 스토리를 잘 쓰는 것도 그림 잘 그리는 것도 아니라고 본다. 그건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지. 대학이 가르칠 수 있는 분야가 있다면 결국 교양일 거다. 철학이 됐건 뭐가 됐건. 애들 보면 스토리 잘 쓰는 기법 같은 거에 집착하는데 그게 진짜 쓰레기다. 그건 결과론적으로 나중에 보니 이런 질서가 있더라는 거다. 가령 사막에서 언덕을 피하다보니 꼬불꼬불한 길이 났는데, 그게 꼬불꼬불하게 가려고 해서 나온 길은 아니지 않나. 그래서 나는 캐릭터 이야기만 한다. 주인공을 꼭 벼랑 끝에 세워야 갈등이 커지는 게 아니다. 이 사람 성격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면 그게 아무리 사소해도 위기고 갈등이다. 입체적으로 그 인물을 얼마나 잘 아느냐에 따라 어마어마한 갈등을 만들 수 있지. 그 안에서 인물에 대한 무릎을 탁 칠만한 통찰이 나올 수 있는 거고.
<#10LOGO#> 모든 창작물을 통틀어 그렇게 무릎을 칠만큼 인간에 대해 잘 보여준 작품을 추천한다면 어떤 걸까.
윤태호: 역시 <슬램덩크>지. 산왕과의 마지막 시합을 보면 강백호가 잠시 빠진 동안 준호가 나간다. 얘는 조연이지 않나. 그러다 나중에 채치수의 회상 장면이 나온다. 모두들 채치수의 가혹한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나가는데 밤에 준호 혼자 책상을 세워놓고 연습하는 장면. 말하자면 조연이고 재능이 없지만 채치수와 함께 꿈을 공유한 친구고 그렇기에 전국대회의 가장 중요한 시합에서 뛸 자격이 있는 거다. 그 정도 회차로 연재가 되면 만화 캐릭터에도 인격이 생기는데 이노우에 형님은 마지막에 이 사람의 자리를 하나 마련해준 거다. 그건 작가가 인격자인 거다. 나도 그래서 <미생>에서 조연이지만 아이와 함께 누운 장면으로 인상을 남겼던 김석호를 챙겨주고 싶었다. ‘김석호 씨는 합격과 동시에 본사로 발령났다’는 한 문장으로라도.
<#10LOGO#> 결국 인간을 대하는 문제인 걸까.
윤태호:우리가 다루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인간의 이야기니까. 모든 창작물은 인간으로 출발해서 인간으로 끝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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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위근우 기자 eight@
10 아시아 사진. 채기원 ten@
10 아시아 편집. 김희주 기자 fift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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