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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詩]서정주의 '밀어(密語)'

시계아이콘00분 33초 소요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굳이 잠긴 잿빛의 문을 열고 나와서/하늘가에 머무른 꽃봉오릴 보아라./한없는 누에실의 올과 날로 짜 늘인/차일(遮日)을 두른 듯, 아늑한 하늘가에/뺨 부비며 열려 있는 꽃봉오릴 보아라. (…)


■ 사춘기 시절 내겐 서정주의 이 시가 '야동'이었다. 이보다 더 야하고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비주얼은 없었다. 이제 돌아와 다시 이 시의 맨살을 들여다보니, 뭐가 야했는지, 글쎄? 그의 시 '입맞춤'은 '짐승스런 웃음은 달더라 달더라 울음같이 달더라'라는 음흉스런 뭔가라도 있지만, 여기엔 그런 것도 없지 않은가. 내가 그때 심정적으로 자지러진 건, 아마도 몇 개의 낱말이 슬쩍슬쩍 흘린 유혹의 기미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잿빛의 문은 아직 '여자'가 되지 못한 성기처럼 느껴졌고, 한없는 누에실은 요즘으로 말하면 '시스루(see through)패션'이고, '뺨 부비며 열려있는'은 애무와 노출이고, '가슴같이 따뜻한'은 벌써 슴가골로 진입한 상황이고, '이제 바로 숨쉬는'은 그 가슴에서 듣는 소녀의 숨소리로 번역되었던 게 틀림없다. 꽃봉오리가 식물의 성기라는 걸 몰랐을 때인데도, 어떻게 그토록 '오버'할 수 있었는지, 나도 내 머리 속 회로가 궁금하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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