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이초희 기자]차가운 맥주에 양주를 섞어 먹는 '폭탄주'는 한국이 원조다. 미국에서 시작된 사케와 맥주를 섞는 '사케밤'도 이름이나 제조방법을 볼 때 분명 한국식 폭탄주의 아류임이 분명하다.
항간에선 그다지 자랑스럽지 못한 문화라는 비평도 있지만 문헌에 따르면 조선시대 양반들도 탁주와 소주를 섞어 마시는 '혼돈주'를 즐겼다고 하니 폭탄주라는 건 어쩌면 우리네 정서에 가장 어울리는 술인지도 모른다.
폭탄주는 술을 섞는 양을 의미하는 '제조비율'을 모든 잔에 동일하게 적용해야 한다. 또 제조할 때는 모든 잔을 동시에 걷어 만들고 또 동시에 마시는 게 통상적인 룰이다. 마시는 속도가 같다 보니 주량의 강약에 관계없이 취하는 시간은 결국 모두 비슷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폭탄주라는 이름은 무시무시하지만 사실은 그 안에 균형, 평등, 분배라는 인류가 이뤄야할 미래지향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철학적인 가치를 담은 폭탄주 문화의 가장 큰 수혜자는 한동안 위스키 업체들이었다. 서민들은 맥주와 소주를 섞는 '소폭'을 즐기지만 술자리 규모가 훨씬 큰 기업의 접대자리에서는 '양폭'이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위스키 업체들은 폭탄주 문화의 은혜를 입어 돈만 벌줄 알았지 그 안에 담긴 평등이라는 메시지는 읽어내지 못한 모양이다.
국내 최대 위스키 업체 디아지오코리아가 세금 탈루혐의로 관세청의 조사를 받고 있다. 디아지오코리아는 이미 4000억원의 추징금을 얻어맞은 바 있지만 관세청이 건드릴 때 마다 고구마 줄기를 캐듯이 문제꺼리들이 끊이지 않고 등장하는 중이다.
디아지오코리아는 주력 제품의 원액을 경쟁사들에 비해 절반 수준으로 헐값 수입하는 방법으로 세금을 탈루 했다고 한다. 참으로 불평등 불공정한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게다가 올 초에는 가격을 인상하겠다고 선언해 대대적인 사재기 현상을 조장했다. 가격은 못 올렸지만 이 때문에 평소 보다 몇 배 높은 판매량을 기록했으니 제갈공명이 살아 돌아와도 박수를 칠 만큼 교묘한 전술이 아닐 수 없다.
폭탄주가 우리나라의 직장인들의 대표 음주 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술맛' 때문이 아니다. 만드는 방법도 마시는 방법도 취하는 것도 모두 공평하기 때문에 누구 하나 손해 보는 사람이 없다는 일종의 안도감 같은 것이 기저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마시는 사람, 즐기는 사람들은 모두 공평함을 원했지만 정작 술을 파는 그들은 그렇지 못했던 것이 유감이다. 요즘 경기 불황 때문인지 양주가 참 안 팔린다고 한다. 술자리에서 먹는 폭탄주도 양폭 대신 소폭이 대세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한때 잘나가던 디아지오코리아도 관세청의 천문학적 추징금과 판매량 급감이라는 악재를 만나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져 있다. 본인들은 괴롭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폭탄주 속에 담긴 진정한 철학을 깨닫지 못한 대가다.
이초희 기자 cho77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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