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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로 본 대한민국 기업의 흥망성쇠

시계아이콘읽는 시간05분 56초

야구단 주인이 된 기업 17곳 '부침의 역사'···김민국 VIP투자자문 대표

[골드메이커]올해 6월 6일 한국 프로야구는 역대 최소경기 300만 관중을 돌파했다. 프로야구 출범 30년 만에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야구는 지역간 경쟁이기도 하지만 구단주인 기업들간에도 자존심을 건 승부이기도 하다. 1982년 프로야구는 6개 구단으로 출범했다. 대구·경북 지역을 연고로 한 삼성 라이온즈, 부산·경남의 롯데자이언츠, 호남의 해태타이거즈, 서울의 MBC청룡, 충청지역의 OB베어즈, 인천·경기·강원의 삼미슈퍼스타즈 등 6개 구단이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를 연 주인공들이었다.


30년이 지난 지금 내년 새로 리그에 합류하게 될 NC다이노스까지 합치면 현존하는 구단 수는 9개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번이라도 야구단의 주인이 된 기업은 17개나 된다. 그만큼 기업들에게도 부침의 역사가 있었단 얘기다.

열성적인 팬들을 등에 업은 롯데자이언츠 정도를 제외하면 야구단 대부분이 150억원 수준의 모기업 지원금을 뺄 경우 적자를 볼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선수들의 몸값은 치솟는데 비해 입장료나 광고수익 등 매출은 비용증가분을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아나 한화처럼 구장 크기가 작고 상대적으로 인구수가 적은 도시에서 프로야구단을 운영하려면 거의 연간 300억원 수준의 지원금이 필요하다는 게 정설이다.


이런 이유로 한국에서 프로야구단을 운영할 수 있는 자격은 연간 수백억원의 홍보비를 추가로 지출할만한 여력이 있는 대기업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반대로 사업이 기울어 비용을 감당할 수 없게 되면 대기업이라 하더라도 구단주 자리를 내놓아야 한다. 또 그 자리를 여력이 있는 새로운 대기업이 메꾼다. 따라서 프로야구의 역사를 보면 대한민국 대기업의 흥망성쇠와 산업의 지형 변화를 파악할 수 있다.

◇원조 터줏대감 삼성과 롯데


프로야구 출범 이후 현재까지 팀명과 연고지가 한 번도 바뀌지 않은 구단은 삼성라이온즈와 롯데자이언츠 뿐이다. 구단주의 자리를 한번도 놓지 않은 것도 대단하지만 82년보다 사세가 훨씬 더 커져 있다는 점도 경탄할 만 하다. 실제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삼성과 롯데의 주력 계열사들인 삼성전자, 삼성화재, 롯데칠성, 롯데제과의 주가는 지난 30년간 꾸준히 올라 액면가 5000원 기준 100만원을 넘는 황제주의 자리에 올라있다.


<삼성전자, 삼성화재(액면가 5000원으로 환산), 롯데칠성, 롯데제과 장기 주가>


팀으로 보면 경상도라는 연고지의 공통점이 있지만 두 팀의 색깔은 완전히 다르다. 삼성은 통산 5회(1985, 2002, 2005, 2006년, 2011년) 우승을 했는데,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의 제일주의가 팀컬러에 그대로 반영된 구단이다. 개막시즌에 아깝게 준우승에 머물렀던 삼성은 회사의 외형에 걸맞게 국내 최고 수준의 투자를 지속했다. 그 결과 삼성은 정규시즌 우승을 밥 먹듯이 하고, 프로야구 출범 30년 동안 22번이나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하지만 한국시리즈 우승은 4번에 불과했다. 그나마 첫 우승도 대한민국 최고의 우승청부사인 김응룡 감독을 영입한 이듬해인 2002년에 가서야 이뤄졌다.


삼성은 이만수, 이승엽, 양준혁, 장효조, 김성래, 김시진 등의 프랜차이즈 스타들을 갖고 있었고, FA제도를 이용해 김동수, 이강철, 심정주, 박진만 등 다른 팀의 간판스타까지 거액을 들여 영입해서 한국의 레알 마드리드를 만들었다. 삼성은 관대한 연봉정책과 복리후생조건 때문에 아마추어뿐만 아니라 경쟁팀 선수들 마저 가장 가고 싶어했던 팀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라도 우승을 해야겠다고 하는 삼성을 싫어하는 안티 팬들은 프로야구를 재미없게 만드는 '돈성'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안겨줬다.


부산을 연고로 한 롯데자이언츠는 자타가 공인하는 전통의 최고 인기구단이었다. 삼성은 프로야구 출범 당시인 30년 전에도 재계순위 1~2위를 다투는 굴지의 대기업이었지만, 롯데는 당시 50위권 회사에 불과했다. 롯데그룹은 임금수준이 낮고 단위당 마진이 높지 않은 제과와 유통을 주력으로 한 탓에 특유의 짠물 경영으로 유명했다.


롯데는 최동원이 한국시리즈에서 나홀로 4승을 기록했던 1984년을 비롯 2번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지만, 2001년 시즌부터 2004년 시즌까지 4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하는 등 2000년대 들어 암흑기를 보냈다. 열정적 이기로 소문난 부산팬들은 '꼴데'로 전락해도 선수에 대한 투자를 하지 않는 롯데를 강력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이후 롯데는 그룹 오너인 신동빈 회장이 야구단에 대한 관심을 갖고 투자를 재개하면서 다시 살아난다. 메이저리그 출신의 로이스터 감독 영입을 포함, 정수근, 이상목, 홍성흔, 정대현, 이승호 등 건당 수십억원 수준의 대형 FA계약을 하면서 성적이 상승하고, 포스트시즌에 자주 진출하는 팀으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최근 롯데는 하이마트, 웅진코웨이 등 대규모 M&A에서 항상 명함을 내밀고 있는데, 30년 전 재계순위 50위에서 현재는 5위권으로 뛰어오른 위상이 프로야구뿐만 아니라 M&A업계에서도 그대로 보여지고 있다. 롯데는 외형이 크고 폼 나는 대기업은 아니었지만, 유통과 제과 등 무리하지 않고 꾸준한 현금흐름을 가져다주는 비즈니스를 유지해왔던 덕분에 30년 동안 살아남은 2개의 기업 중 하나가 된 것이다.


◇비운의 주인공 해태


지역라이벌이자 과자라이벌로 롯데와 쌍벽을 이뤘던 해태타이거즈의 몰락은 야구팬들 뿐만 아니라 투자자 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빨간색 상의에 검은색 바지의 해태의 원정 유니폼은 타팀에게는 공포의 상징이었다. 여기에 선동열이 6회쯤 몸을 풀기 시작하면 상대팀은 주눅이 들어 거의 경기를 포기하기에 이른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다. 우승 횟수가 무려 9회로 역대 최다 우승 타이틀을 갖고 있다.


해태그룹의 비극은 역설적으로 너무 잘 나가는 타이거즈에서 비롯됐다. 82년 출범 당시 프로야구에 참여 할 기업의 조건은 '재무구조가 탄탄한 노동자 수 3만 이상'의 대기업이었는데 문제는 호남지역이었다. 호남 내에는 이 기준에 맞는 기업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출향 기업인의 고향이 호남인 기업을 찾다 보니 태타이거즈가 낙점됐다. 차선택으로 낙점됐지만 해태타이거즈는 대기업들 이상의 존재감을 보였다.


그러나 박건배 회장은 구단의 품격에 기업의 외형을 맞추려고 하는 듯 무리한 확장에 나선다. 탈식품을 선언한 후 해태제과 내에 건설사업부를 설립하고 인켈, 나우정밀을 인수해 해태전자에 합병시켰으며 심지어 중공업도 출범시켰다. 거칠 것이 없었던 해태는 IMF를 만나 1997년을 기점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잘 모르는 사업이었던 전자사업에 과다하게 투자했던 건이 문제가 되고 이어 중공업에서도 큰 폭의 적자를 기록하고 부채가 급증하면서 결국 주력 계열사인 해태제과 마저 부도를 냈다.


97년 '오...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라는 성대모사로 알려진 김응룡 감독의 코멘트처럼 주요 선수들을 트레이드하며 운영비를 충당하면서 버티던 해태타이거즈 또한 결국 2001년 기아자동차로 인수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됐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없지만, 만약 해태가 프로야구단에 발을 들이지 않았더라면, 회장이 다른 대기업 구단주들을 만나서 회사 외형에 대한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았더라면, 롯데처럼 알짜 주력업종에 더 집중했더라면...이라는 아쉬움이 드는 대목이다. 투자자가 만약 프로야구 출범 시점에 롯데에 투자했다면 100만 원짜리 주식의 주주가 돼있겠지만 해태에 투자했다면 손에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주인은 같지만 이름이 바뀐 OB와 빙그레


충청도를 기반으로 출범했던 OB베어스는 1985년도에 연고지를 서울로 옮겼다. 그 뒤 OB맥주가 두산그룹에서 분리돼 외국계 회사로 인수되면서 두산 베어스로 팀명을 변경했다. OB베어스는 프로야구 출범 당시에 비해 연고지와 팀명은 달라졌지만 주인 자리에는 변경이 없이 현재까지 맥이 이어진 셈이다.


두산은 원래 한국네슬레, 한국3M, KFC, 폴로 등을 소유한 소비재 기업이었고 간판회사는 OB맥주였다. 현재도 야구장의 가장 큰 인기품목은 치킨과 맥주, 속칭 치맥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맥주회사가 야구단을 하기로 한 건 좋은 마케팅적 선택이었다. 하지만 이제 두산은 몇 번의 M&A를 거치며 산업재 회사가 됐다. 즉 1999년 프로야구단 명칭이 OB에서 두산으로 바뀐 것은 기업의 주력사업을 소비재에서 중공업으로 성공적으로 전환시킨 두산그룹의 변천사를 상징해주는 사건이다. 현재로선 굳이 야구단 마케팅을 이어갈 이유가 없지만 두산 오너들의 야구 사랑은 필요보다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산으로부터 충청 연고지를 다시 넘겨받은 팀은 빙그레 이글스였다. 이글스는 1986년부터 프로야구리그에 참가하기 시작, 당대의 명장 김영덕 감독을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팀을 정비해 1988, 1989, 1991, 1992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할 정도로 최전성기를 보냈다. 이후 동생인 김호연 회장이 빙그레를 계열분리를 통해 독립하면서 1994년 모그룹의 이름을 따라 한화이글스로 팀명을 변경해 99년 우승을 일궈냈다.


계열분리 전 빙그레는 화약사업이 중심인 한화그룹에서 유일한 소비재 회사였다. 따라서 OB와 마찬가지로 야구단 마케팅을 활용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이후 그 필요성이 적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구단을 유지한 결과 일반인들에게 생소했던 한화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효과를 거뒀다고 평가된다. 2002년 한화가 생보업계 2위 대한생명을 인수하면서부터는 구단 마케팅이 계열 금융회사 위주로 이뤄지고 있다.


◇격동의 연고지 인천


가장 많은 프로야구팀들이 만들어졌다가 사라진 연고지는 바로 인천이었다. '슈퍼스타 감사용'이라는 영화의 소재가 됐던 삼미슈퍼스타즈를 필두로 1985년 청보핀토스, 1988년 태평양돌핀스, 1996년 현대유니콘스까지 팀이 계속 변경됐다가 현재는 SK와이번스가 인천을 연고로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다.


삼미, 청보, 태평양은 야구단을 감당할 정도의 외형을 가졌던 대기업은 아니어서 타의 혹은 자의로 구단 운영에서 손을 떼게 됐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삼미와 청보가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과 달리 태평양(현 아모레퍼시픽)은 우리나라 최고의 화장품 회사로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1987년 청보핀토스로부터 5년 거치 5년 분할 상환에 50억원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야구단을 인수한 태평양은 8년 뒤 프로야구 사상최고가격인 470억원에 현대그룹으로 매각했다. 이는 당시 태평양의 기획조정실을 맡고 있던 서경배 사장의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추진됐는데 당시 태평양은 돌핀스 뿐만 아니라 태평양증권, 태평양경제연구소를 SK에 매각했고, 1995년 한국써보, 1996년 태평양패션, 1997년 여자농구단을 잇따라 정리했다.


태평양돌핀스가 이처럼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었던 원인은 그 당시가 비교적 경기가 좋았던 IMF 이전이었을 뿐 아니라 태평양이 정상적인 기업활동을 하고 있던 상황에서 매각을 추진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현대 그룹 정주영 회장이 현대피닉스라는 아마야구단까지 만들어 프로리그에 진입하려는 강한 열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상황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태평양은 야구단 매각대금을 요긴하게 활용했고 이 자금은 결과적으로 태평양이 IMF 파고를 넘기는 디딤돌의 역할까지 해줬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소를 잃기 전에 외양간을 고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일깨워주는 사례다.


똑같은 인천 연고팀이지만 항상 최약체로 구분되던 이전 팀들과는 달리 현대는 정주영 회장과 모그룹의 막강한 지원에 힘입어 무려 4차례나 우승기록을 갖게 됐다. 특히 창단 3년만에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현대 유니콘스는 모그룹의 지원과 영향력이 야구단의 실력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였다.


하지만 이런 화려한 역사도 모기업인 현대전자(하이닉스)의 몰락과 함께 종말을 고했다. 현대그룹을 승계한 현정은 회장이 먼저 지원을 중단한 데다가 자금력이 막강한 현대기아차그룹 또한 기아타이거즈를 이미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범현대가의 어느 누구도 손을 내밀지 않아 현대유니콘스는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2008년 투자회사 센테니얼 인베스트먼트가 현대 선수단과 프런트를 승계해 '우리히어로즈'를 창단했다. 홍보를 목적으로 한 모기업 없이 야구단을 운영하려고 했던 시도는 각 팀이 탐낼만한 수준급 선수들을 현금을 받고 팔아 운영비를 마련하는 등 시행착오를 거쳤다. 하지만 넥센타이어가 메인스폰서를 자처하고 프로야구가 큰 인기를 끌면서 자체운영만으로도 손익분기점에 근접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젊은 신흥 구단주들


어린 시절 야구를 보고 자란 젊은 경영진들은 야구를 적극적인 마케팅의 도구로 보고 있다. 대표적인 선도자는 넥센의 강호찬 사장이다. 직접 야구단을 소유하는 형태는 아니지만 넥센히어로즈에 대해 메인스폰서십 계약을 체결함으로써 후발주자인 넥센타이어의 브랜드 가치를 크게 개선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요즘 기업과 구단 모두 잘 나가는 행복한 상황이다.


그 다음 주자는 엔씨소프트의 김택진 사장이다. 지난 5월 8일 KBO이사회에서 창원을 연고로 하는 NC다이노스의 2013년 1군 진입 확정으로 9구단 체제가 확정됐다. 김택진 사장의 지분매각으로 넥슨으로 팀명칭이 바뀌지 않을까하는 예측도 있었지만, 팀명칭은 그대로 유지된다는 공식발표와 함께 2013년은 NC다이노스가 1군 무대에 등장하는 첫 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 만약 NC가 넥슨으로 이름이 바뀌는 것으로 결정됐다면 영어알파벳이 한 자 틀린(NEXON과 NEXEN) 이유로 종종 혼동되는 두 회사의 야구단이 한 경기장에서 대결을 펼치는 재미있는 광경을 목격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산규모나 매출액 같은 전통적인 의미에서 대기업이 아니지만 엔씨소프트는 2000년대 이후 새롭게 부상한 IT업계의 상징적인 존재로 시가총액만 6조원에 육박하는 알짜회사다. 이미 일본에선 소프트뱅크와 라쿠텐 같은 IT기업들이 출범 초기 의구심을 극복하고 야구단을 잘 경영해가고 있다. 엔씨소프트가 벤처의 몸으로 리니지라는 세상에 없던 새로운 제품을 냈던 것처럼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야구에서도 신선한 바람을 불러 일으키길 기대해본다.


김민국 VIP투자자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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