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사회에서 '유리 천장'이 서서히 깨지고 있다. '여성 임원 1세대' 시대가 태동하고 있다. 1980년대 입사한 신입 공채들이 '별'을 달기 시작했다. 이른바 '여풍(女風) 시대'의 개막이다.
미국의 유명한 심리학자 에이드리엔 멘델은 <유능한 여자는 많은데 왜 성공한 여자는 없을까>라는 저서에서 직장 생활에는 여자가 모르는 불문율이 분명 존재한다고 말한다. 멘델은 유능한 여성은 많은데 성공하는 여성이 적은 이유로 "여성이 목표지향적인 남성 사회의 룰을 모른 채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려는 관계지향적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비즈니스라는 게임에서 이기려면 유능한 척, 강한 척하고 재미가 없어도 중간에 그만두지 말고, 감정을 개입시키지 말고, 필요하면 싸우고, 팀의 일원임을 명심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남녀를 불문하고 우리나라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꿈을 꾸는 기업의 별(임원). 불과 5년 전만 해도 상상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주체는 남성이었다. '여성 중용'을 강조했지만 사실상 조직은 남성 문화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지난 연말부터 대기업의 분위기는 확 달라졌다. 90년대 뽑은 대졸 여성 공채 직원이 별을 달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여성 공채 1기가 상무로 진급한 사실은 상징적인 의미가 매우 컸다. 말 그대로 유리 천장에 금이 가기 시작한 신호탄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한 조직에서 오랜 시간 몸담으며 남성과 당당히 경쟁해 살아남고 인정을 받으며 승승장구하는 그들. 유리 천장을 과감히 깨트린 여성 임원의 눈으로 바라 본 세상은 어떠할까.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겪은 파란만장한 그녀들의 인생 스토리. 20~30대 새내기 여성 직장인 후배들에게 들려주고픈 대한민국 여성 임원들의 생생한 경험담을 전한다.<편집자주>
[파워女星 임원 꿰찬 1세대 그녀들의 Success Diary]
⑧윤여순 LG아트센터 대표
자식의 꼭 필요한 말 들어주기
'퀄리티 톡'으로 마음 전해
여자로선 최장수 임원 13년
CEO 강의 섭외 땐
최대한 몸 낮춰, 온 정성 쏟아
[아시아경제 김혜원 기자] 이제 1년 5개월이 지났다. 은둔 경영의 길을 택한 것은 '아는 게 적어 말할 게 없어서'였다. 15년 동안 교육 업무만 맡았고 별(임원)의 위치에 당당히 올랐다. 이쯤에서 직장 생활이 끝날 걸로 생각하던 어느 날, 하루아침에 예술ㆍ문화 분야의 거장 자리를 맡게 됐으니 조심스러울 만도 했을 터다.
"경험이 일천한 상황에서 취임 포부를 밝히는 것 자체가 겸손하지 못 하다는 생각이 들어 모든 인터뷰를 거절했어요. LG아트센터에 오고 나선 이번이 처음이네요.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때 언론에 목소리를 내는 게 순리인 것 같아요."
LG그룹이 배출한 첫 여성 임원, 윤여순 LG아트센터 대표(57)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지난 1995년 나이 마흔에 LG인화원 부장으로 '늦깎이' 직장인이 된 윤 대표는 입사 5년여 만에 상무로 승진했다. LG인화원 전무로 있던 그가 최고경영자(CEO)로 LG아트센터에 온 것은 지난해 초. 그 동안 단 한 차례도 공식적인 인터뷰를 하지 않았다. 늘 따라붙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라, 자신을 드러낼 때와 드러내지 않아야 할 때를 잘 알아서다.
LG인화원 시절 대외적으로 노출됐던 윤 대표의 모습은 CEO로서 현재와 조금 달랐다. '교육'에만 몰두했던 지난 십 수 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윤 대표는 LG아트센터, 나아가 우리 국민의 문화 의식에 대한 뚜렷한 가치관을 쌓고 있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2만달러에서 3만달러 시대로 가기 위해선 문화적인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국격을 높이고 한 단계 도약하려면 제2의 스티브 잡스와 같은 1등 기업, 1등 상품이 나와야 한다"면서 "창의성을 개발하려면 평소에 예술을 접하라"고 당당히 조언했다.
우리나라 여성 임원 중에서도 최고참 격인 윤 대표, 여성스러운 카리스마가 더 진한 인상을 남긴다는 그의 인생 철학을 공유하고자 한다.
◆LG 입사 스토리요? 쇠망치로 맞은 기분이었죠
남편 따라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주부가 향후 LG그룹의 인재 교육을 전담하는 임원(전무)이 되기까지 그의 인생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갑자기 건너 가 무료하기 짝이 없던 미국 생활. 그러던 중 남편 학교에서 청강하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LG아트센터 대표 윤여순'을 만들었다.
LG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5년이다. 당시 윤 대표는 불혹(마흔)의 나이. 그는 인생 '2라운드'를 꿈꾸고 있었다. 딸아이가 유치원을 다닐 무렵 온 가족이 짐을 싸 고국으로 돌아왔고 윤 대표는 '교육' 관련 학과의 교수가 되려고 대학교를 기웃거렸다. 이때만 해도 우리나라 대기업에서 일을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성 1호 임원이 되리라곤 상상조차 안 해봤다.
기회는 예기치 않게 다가왔다. 지인으로부터 LG인화원에서 일을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게 된 것. 윤 대표는 김용선 당시 LG인화원 원장과 배석한 식사 자리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김 원장의 소신 있는 발언에 윤 대표는 "쇠망치로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기업은 시작이 있으면 결과를 내야하고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하는 조직입니다. 윤 박사가 이런 데 와서 일하면 대학 이상의 전문성을 익힐 수 있을 것 같네요. 인간적으로도 훨씬 더 큰 그릇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평범해 보이는 김 원장의 이야기는 사실 많은 의미를 담았었다. "김 원장을 만나고 귀가하는 길에 많은 생각을 했어요. 기업은 약은 장사꾼 같은 사람이 모여 일하는 곳이라는 고정관념을 갖고 적대적인 눈으로 바라봤는데 김 원장의 말이 무슨 뜻인지 한 번에 알아듣겠더라고요. 한마디로 필이 통한 거죠. 그 이후로 LG에 입사해 단 한 번도 후회란 걸 해본 적이 없어요." 윤 대표의 고백이다.
◆딸이 눈물 뚝뚝 흘리던 그날, 잊을 수 없죠
"학교에 갔다 오면 엄마가 앞치마를 두르고 쿠키 구워서 학교 잘 다녀왔니? 이렇게 맞아주면 좋겠어."
윤 대표가 LG인화원에서 일과 사랑에 푹 빠진 시절, 하나 밖에 없는 초등학생 딸이 대뜸 말을 던졌다.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는 딸의 모습에 윤 대표의 머리는 텅 비어버렸다. 그는 "일에 더 흥미를 느끼고 앞만 보고 달리던 때, 딸의 눈물로 한 순간에 무너져 버렸다"며 "최대 위기가 닥쳤다"고 회상했다.
인터뷰 도중 걸려온 전화. '클럽'에 드나들 나이로 부쩍 자란 딸이다. "엄마, 인터뷰 잘 해!" 울먹이며 엄마를 애타게 찾던 딸은 어느새 '친구'가 됐다. 일을 포기할 수 없었던 윤 대표가 택한 것은 '퀄러티 톡(Quality Talk)'.
"아이한테 그랬죠. 엄마가 모든 이야기를 들어줄 수는 없지만 꼭 하고 싶은 중요한 말은 어떤 일이 있어도 관심을 가져주겠다고. 일을 마치고 녹초가 돼 귀가하면 지키려고 노력했어요. 가끔 꾸벅꾸벅 졸기도 했죠. 결국 딸과 신뢰가 쌓이면서 고등학교 때는 '일하는 엄마'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되더라고요."
그러면서 여성 직장인으로 가장 큰 걸림돌인 '육아'에 있어 자책감을 느끼지 말라고 강조했다. 오히려 모성애를 근간으로 한 자녀 교육이 대한민국을 이룬 원동력이라는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고 했다. 과장, 차장을 거치면서 반드시 닥치는 육아와 관련한 위기의 고비를 지혜롭게 넘기라면서 하는 말.
"'길티 필링(Guilty Feeling)' 절대 갖지 마세요. 함께 시간을 못한다는 이유로 더 많이 과외 시키고, 원하는 걸 다 사주고 그래야 한다는 이상한 등식을 갖지 말란 얘깁니다. 일하는 여성도 스스로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잖아요. 환경이 이렇게 됐지만 같이 헤쳐 나가자는 분위기를 만드는 게 맞아요. 오히려 엄마가 직장을 가진 자녀를 보면 스스로 알아서 하는 독립성이 강해요"
◆여자요? 감정 섞이면 판단력 잃고 다급해져요
겉보기엔 '실패'라는 단어와 거리가 멀어 보이는 윤 대표지만 아찔했던 순간은 많았다. 대표적인 것이 LG인화원에 입사해 만든 첫 작품, '사이버 아카데미'다. 다소 이른 시점에 성과를 내고 싶었던 윤 대표는 당시 파격적인 인터넷 교육 시스템을 사내 구축하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였다. 주위에선 "일하는 회사에서 무슨 공부냐"며 회의적인 시각을 보일 때라 시작부터 어려움이 따랐다.
오기가 발동한 윤 대표도 고집으로 맞섰다. 그러다 갑자기 닥친 외환위기는 윤 대표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회사가 어려운데 교육이나 운운하는 철없는 여성'으로 비춰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윤 대표는 "할 데까지 도전해보고 정 안 되면 그만두겠다는 생각으로 사표를 품에 안고 다녔던 시절"이라고 말했다. 소신과 뚝심이 통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미운 오리 같았던 '사이버 아카데미'는 점차'미래를 내다보는 성과물'로 자리매겨졌다. 여기에 "우리는 왜 여성 임원이 없느냐"는 LG 오너의 한 마디는 윤 대표에 힘을 실어줬다. 그렇게 LG에서 첫 여성 임원의 타이틀을 거머쥐게 됐다.
"여자요? 감정 섞이면 판단력 잃고 다급해져요. 그럴 땐 숨을 돌려야 해요. 저도 많이 좌충우돌했는데 어느 순간 지혜를 갖고 길게 보려고 하니까 길이 보이더라고요."
◆'계획보단 소신' 밀어붙이니 되더라
LG인화원 시절 때다. 초창기 LG인화원의 강의는 대학 교수가 전담하다시피 했다. 현직 경영인이 일을 내팽개치고 강의를 다닌다는 것 자체가 허락되지 않던 시절이다.
그럼에도 윤 대표는 현장 소리를 들려줄 수 있는 경영자를 강단에 세우고 싶어 직접 섭외에 나섰다. 머리를 조아리고 허리를 굽히는 윤 대표를 곁에서 본 같은 팀원은 "상무님, 이제 그만하세요"라며 말릴 정도였다고. 당시 그는 이렇게 말한 것을 분명히 기억한다. "내가 은퇴할 때가 되면 풍토가 바뀔 것이니 두고 봐라. 인화원 교육 프로그램 잘 만들었다는 평은 물론, 오히려 강의를 하고 싶다고 로비 받을 걸." 리더로서 굉장히 외롭고 힘들었다며 이제서야 털어놓는 그다. 3년여 전 LG그룹 내 한 임원은 전화를 걸어 와 "윤 전무가 강의하게 해줘서 승진하게 됐다"는 이야기를 했다.
미국에 있을 때 우연히 갔던 파티에서 경험한 에피소드 하나. "파티 참석자 중에 20여년 초등학교 교사를 지낸 남성과 새파랗게 젊으면서 건방진 변호사가 눈에 띄더라고요. 둘의 대화를 듣게 됐는데 '똑같은 아이들에게 똑같은 것을 가르치는 인생이 지루하지 않느냐'는 변호사의 조소 섞인 물음에 선생이 이렇게 답했어요. '난 단 한 번도 똑같이 가르쳐 본 적이 없어서 지루한 적이 없다'고."
어느덧 50대 중반의 그에게 주위에선 종종 "학교로 갈 수 있도록 미리미리 강연도 하고 그러세요"라며 충고를 한다. 대기업 임원이 말 그대로 '임시 직원'이 될 수 있으니 또 다른 삶을 준비하라는 뜻을 이해는 한다. 하지만 윤 대표는 이렇게 답한다.
"저는 인생에 계획이 없는 사람이에요. 처음에 임원이 됐을 때도 주위의 달콤한 유혹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더라고요. 1인당 GDP 3만달러 시대로 가려면 저와 같은 여성이 사회로 많이 나와야 합니다. 선순환이 일어나기 위해선 여성이 일을 적극적으로 해야 해요." 윤 대표는 철저하게 '현재 진행형' 인간이라서 그렇다. 그는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것보단 현재에 죽도록 열심히 하면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생기는 것 같다"고 언급했다. LG에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자신에게 자부심을 느낀다고도 덧붙였다.
김혜원 기자 kimh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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