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흐르는 세월은 막을 수 없었다. ‘농구 대통령’ 허재는 내내 숨을 헐떡였다. ‘재간둥이’ 강동희는 림을 맞히지도 못하고 빗나간 슛에 고개를 숙였고 ‘에어본’ 전희철은 한참 후배인 최진수에게 블로킹을 당했다.
28일 서울 잠실 실내체육관. 추억의 스타들은 코트에 땀을 흘리며 진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2012 KB국민카드 프로농구 ‘15주년 레전드 올스타전’이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나선 선수들은 모두 1990년대 한국농구에 전성기를 가져온 주인공들이었다. 허재, 강동희, 김유택으로 이어지는 전설의 ‘허동택 트리오’는 물론 연세대와 고려대의 뜨거운 라이벌전을 연출한 이상민, 전희철, 우지원, 문경은, 김병철, 양희승 등이 코트에 얼굴을 내비쳤다.
이전의 화려한 기량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는다는 정재근을 제외하면 대부분 체중은 불어있었다. 생각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은 건 당연했다. 경기를 주최한 프로농구연맹(KBL)은 이 점을 감안, 한 쿼터를 7분으로 산정했다. 2, 3쿼터 오세근, 최진수, 김선형 등의 와일드카드 출전도 함께 허용했다. 배려 묻은 코트에서 불혹을 넘기지 않은 30대들은 펄펄 날았다.
그 선두주자는 ‘코트의 황제’ 우지원. 4쿼터에만 13점을 넣는 등 총 23득점으로 드림팀의 73-62 승리를 견인했다. 수비에서도 8리바운드를 잡아내며 제 몫을 해냈다. ‘피터팬’ 김병철의 활약 또한 만만치 않았다. 코트를 종횡무진 오고가며 22득점 6리바운드를 기록, 깊은 인상을 남겼다. 40대들은 이를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조금만 뛰어도 숨을 고르기 바빴던 까닭이다. 체력보완 차원에서 펼친 지역 방어도 도움이 되지 못할 정도였다.
전주 KCC 감독인 허재는 “8년 만에 선 코트가 어색하다. 오랜만에 땀을 흘리는데 힘들어서 못하겠다”라고 혀를 내둘렀다. 그는 코트 밖으로 교체된 지 10분 뒤에야 정상적인 심호흡을 되찾을 수 있었다. 현역시절 콤비를 이뤘던 강동희 원주 동부 감독도 진땀을 흘린 건 마찬가지였다. 경기 내내 더딘 움직임을 노출한 그는 “숨이 차서 죽을 것 같다. 실력보다 마음만 앞서는 것 같다. 동부 선수들을 볼 면목이 없어졌다”라며 고개를 숙였다. 현역시절 특유 3점 슛으로 ‘람보’로 불린 문경은 서울 SK 감독도 “유니폼은 편안한데 골 결정력이 따라주지 않는다”며 “마음은 들어갈 것 같은데 안 들어가니 미치겠다. 오랜만에 뛰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망신 아닌 망신을 당하면서까지 이들이 코트에 땀에 쏟은 건 한국농구의 부흥을 위해서였다. 구름떼 같던 소녀 팬들은 농구장에서 어느덧 자취를 감췄다. TV 중계 시청률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쳤고 각 팀 간판선수들의 입지 또한 크게 축소됐다. 잇따른 추락에 지난해 6월 경선을 통해 KBL 새 총재에 당선한 한선교 한나라당 국회의원은 관중 150만 시대를 열어 프로농구를 중흥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그는 당선 소감에서 “팬과 구단, 언론과의 스킨십을 통해 프로농구 발전과 KBL 개혁을 이끌겠다”라고 말했다.
‘15주년 레전드 올스타전’은 원대한 사업의 일환이었다. 왕년의 스타들은 위기감을 인식하고 뜻을 함께 했다. 팀 일정으로 불참이 예상됐던 허재는 극적으로 경기에 합류했고 미국에 체류 중이던 ‘영원한 오빠’ 이상민은 15시간여의 비행을 거쳐 팬들 앞에 얼굴을 내비쳤다.
한국농구를 살리기 위한 선배들의 몸부림은 경기 뒤에도 엿볼 수 있었다. 경기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된 우지원은 벅찬 소감 대신 “평균 20득점 이상을 기록하는 국내 선수가 없다. 외국인 선수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아진 것 같다”며 “슈터의 활용도가 떨어지다 보니 연습도 잘 안하는 것 같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멀티 플레이어가 선호되는 추세다 보니 특징을 갖춘 선수들이 사라진 것 같다”며 “열정과 꿈이 더 필요할 때”라고 말했다. 함께 만점 활약을 펼친 김병철은 “어린 선수들이 지켜본다는 생각에 최선을 다해 뛰었다”며 “후배들에게 이번 경기가 본보기로 비춰졌으면 좋겠다”라고 밝혔다.
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 leemean@
스포츠투데이 정재훈 사진기자 ro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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