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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듀! 2011스포츠②]떠오른 스타와 저물어간 별


[스포츠투데이 김흥순 기자]2011년은 올림픽, 월드컵 등 국제적인 스포츠 이벤트가 숨 고르기에 들어간 가운데 프로 스포츠가 팬들의 관심을 끌어 모았다.


화두는 단연 프로야구였다. 프로출범 이후 최초로 600만 관중 시대를 열어젖힌 프로야구는 폭발적인 흥행몰이와 함께 치열한 순위다툼으로 팬들을 사로잡았다. 야구의 빛에 가리긴 했지만 프로축구도 올 시즌 의미 있는 기록을 남겼다. 승부조작 사건으로 최대 위기를 맞았지만 발 빠른 조치와 진심어린 자정노력으로 프로출범 이후 첫 300만 관중을 돌파했다. 양대 프로스포츠가 만들어낸 다양한 이슈 속에 올 해도 어김없이 최고의 별들이 탄생했다. 그들이 전하는 공통적인 키워드는 ‘화려한 부활’이다. 여기에 내년 런던올림픽에서 기대를 모으는 리듬체조 요정도 자리를 빛냈다.

반면 환희와 감동 뒤에는 어김없이 슬픔과 아쉬움이 공존하기 마련.


2011년 스포츠계에는 유독 안타까운 사연들이 많았다. 한국 스포츠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영웅들이 영원한 별로 우리 곁을 떠났다. 국위를 선양하던 스포츠 스타들의 잇따른 부진도 팬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여기에 갑작스럽게 선장을 잃어버린 축구계의 씁쓸한 현주소도 지켜봤다. 스포츠투데이는 다사다난했던 2011년, 뜬 별과 진 별들을 살펴봤다.

◇ 2011 최고의 뜬 별


▲ 윤석민


2011 프로야구 최고의 별은 윤석민(KIA)이었다. 윤석민은 올 시즌 다승(17승), 평균자책점(2.45), 탈삼진(178개), 승률(0.773) 등 4개 부문을 모두 자신의 이름으로 장식하며 최고의 해를 보냈다. 투수부문 4관왕은 1991년 선동열 KIA 감독 이후 20년 만에 달성한 기록. 뛰어난 맹활약에 힘입어 윤석민은 2011 프로야구 최우수선수(MVP)와 골든글러브 투수부문 수상자로 선정되며 이견이 없는 최고의 선수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비록 팀은 준 플레이오프에서 고배를 마셨지만 윤석민에게는 지난 2년간의 부진을 털어내는 화려한 비상이었다.



▲ 최형우

올 시즌 프로야구의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최형우(삼성)다. 최형우는 올해 홈런(30개), 타점(118점), 장타율(.617) 부문에서 정상에 오르며 삼성을 통합 우승으로 이끌었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로 주가를 올렸지만 그가 걸어온 길은 결코 녹록지 않다. 지난 2002년 포수로 삼성 유니폼을 입었지만 성적 부진을 거듭하다 2005년 팀에서 방출 통보를 받게 된다. 이후 경찰청에 입단해 외야수로 전향, 끊임없는 노력으로 재기를 노린다. 2군 리그에서 빼어난 활약을 펼친 최형우는 2008년 다시 삼성 유니폼을 입고 프로무대로 돌아온다. 그 해 신인왕을 거머쥐며 부활을 알렸고 계속되는 노력으로 한 걸음씩 도약한 끝에 타자부문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봉동 이장’ 최강희


한국 축구를 새롭게 이끌어 갈 선장으로 최강희(52) 감독이 낙점됐다. 올 시즌 전북 현대를 이끌고 K리그 정상에 오른 최강희 감독은 지도력과 선수관리 능력 뿐 아니라 팬들과의 소통에서도 합격점을 받았다. ‘닥공’으로 불리는 화끈한 공격 전술로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에 올랐고 K리그에서도 시즌 내내 선두를 유지하며 통합 챔피언을 달성했다. 김상식, 이동국 등 ‘한물갔다’는 평가를 받던 선수들을 불러 모아 최고의 스타로 재도약시키며 ‘재활공장장’이란 별칭을 얻기도 했다. 소속팀 지역 이름을 빗대 ‘봉동 이장’으로 불려온 최강희 감독은 우승이 확정 된 후 밀짚모자와 장화를 신고 팬들의 환호에 보답하기도 했다. 전북 팬들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한국축구의 구세주로 떠오른 최강희 감독이 다가오는 월드컵 예선에서도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 이동국

2011 프로축구는 ‘라이언 킹’ 이동국(전북)을 위한 무대였다. 올 시는 K리그에서 16골 15도움을 기록한 이동국은 프로데뷔 이후 처음으로 도움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신인상(1998), MVP(2009), 득점왕(2009)에 이어 도움왕에도 이름을 올리며 K리그 최초로 4대 개인상을 모두 휩쓰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준우승에도 불구하고 득점왕(9골)과 MVP에 선정되며 최고의 주가를 올렸다. 한 물 갔다는 평가를 뒤엎고 최강희 감독의 신뢰 속에 유감없이 기량을 발휘한 이동국은 전북을 통산 두 번째 K리그 정상으로 이끌었다. 최우수선수(MVP)에도 이름을 올리며 적수가 없는 최고의 별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 손연재

한국 리듬체조의 희망 손연재(세종고)가 2012 런던올림픽 최고의 기대주로 떠올랐다. 손연재는 지난 9월 프랑스 몽펠리에에서 열린 2011 국제체조경기연맹(FIG) 리듬체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개인종합 11위에 올라 상위 15명에게 돌아가는 올림픽 직행 티켓을 따냈다. 한국 선수가 리듬체조 올림픽 본선에 출전하는 것은 2008 베이징올림픽 신수지(세종대)에 이어 역대 두 번째. 지난해 세계선수권대회 예선에서 32위에 그쳤던 손연재는 올해 러시아에서 외롭고 고된 훈련을 거쳐 불과 1년 만에 순위를 20계단 이상 끌어올렸다. 내년 올림픽 본선 무대에서도 톱10 진입을 목표로 훈련에 매진하고 있다. 손연재가 무서운 상승세를 이어나가며 한국 올림픽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워 나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 2011년 저물어간 별


▲ 불멸의 레전드 장효조·최동원


소중한 사람은 떠난 뒤에야 그 빈자리를 새삼 일깨워준다. 지난 9월 우리는 야구계의 영원한 별을 일주일 간격으로 떠나보냈다. 2011년 9월 7일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교타자로 이름을 날린 장효조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5세. 1983년 삼성 유니폼을 입고 프로무대에 데뷔한 장효조는 영원한 3할 타자로 불리던 타격의 교과서였다. ‘배트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을 친다’던 타격 천재. 통산 타율 0.331로 불멸의 기록을 남겼다. 영원한 삼성맨을 꿈꾸던 그는 1989년 갑작스럽게 롯데로 트레이드 되는 아픔을 겪는다. 1992년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한 뒤 롯데 코치(1994년)와 삼성 타격코치(2000년)로 지도자 생활을 거쳤다. 스카우터로 한동안 그라운드를 떠나 있던 그는 2010년 2군 감독으로 삼성 유니폼을 다시 입게 된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영원한 전설로 팬들의 가슴속에 남게 됐다.


불멸의 전설 ‘무쇠팔’ 최동원이 일주일 뒤 대장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향년 53세. 1983년 롯데 유니폼을 입고 프로에 데뷔한 최동원은 프로야구사에 길이 남을 대기록을 작성했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7차전 가운데 5차례 등판해 홀로 4승을 책임지며 롯데에 창단 첫 우승을 안긴다. 그해 다승왕(27승)과 최다 탈삼진(223개), MVP를 거머쥐며 최고의 투수로 이름을 올린다. 150km를 넘나드는 강속구와 낙차 큰 변화구로 상대 타자들을 압도했다. 1987년에는 선동열(당시 해태)과 연장 15회까지 가는 맞대결을 펼치며 200개 이상의 투구수를 기록했다. 선수협 결성 문제로 1989년 삼성에 트레이드 된 그는 마음을 잡지 못하고 쓸쓸히 유니폼을 벗었다. 2001년 한화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지만 순탄치 않았다. 2007년 한화 2군 감독을 마지막으로 지도자 생활을 마감한 그는 그토록 꿈꾸던 롯데 감독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영원한 전설이 되고 말았다.



▲ 산악계의 큰 별 박영석


산악계 큰 별의 실종 소식은 우리를 안타깝게 했다. 지난 10월 18일 박영석 대장과 강기석, 신동민 대원이 히말라야 안나푸르나(8,091m) 등반 도중 6500m 지점에서 통신 두절로 실종됐다. 잇따른 수색작업에도 원정대의 자취를 끝내 찾지 못했다. 박영석 대장은 1993년 히말라야 에베레스트산을 국내 최초로 무산소 등정에 성공, 산악인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2001년 케이투(8611m)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8천 미터 14좌 완등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이후 2004년 남극점 도보탐험과 2005년 5월 북극점 정복에도 성공했다. 3극점(북극점, 남극점, 에베레스트)과 히말라야 14좌, 7대륙 최고봉을 모두 등반하며 세계 최초의 산악 그랜드 슬램을 달성, 기네스북에도 이름을 올렸다.



▲ 추신수

추신수(클리블랜드·29)에게 올 시즌은 악몽과 같은 한 해였다. 그는 메이저리그 한국인 최고 타자로 이름을 날리며 2009년과 2010년 두 시즌 연속 20-20클럽과 3할 타율을 기록했다. 팀 내 간판으로 기대를 모으며 시즌을 맞았지만 지난 5월 음주 운전으로 경찰에 체포되며 망신을 샀다. 미국 언론에 이어 한국에서도 대대적으로 보도된 이 사건으로 집행유예 1년에 벌금형을 선고받는다. 한동안 자숙의 시간을 보냈지만 극심한 슬럼프로 이름값을 하지 못했다. 손가락과 허리 부상이 이어지며 일찌감치 시즌을 마감했다. 아시안게임 병역혜택으로 최근 4주간 군사 훈련을 마친 추신수는 동계 훈련을 통해 내년 시즌 부활을 위한 각오를 다지고 있다.



▲ 박주영


박주영(아스널·26)에게 잉글랜드는 시련의 연속이었다. 지난 8월 프랑스를 뒤로하고 야심차게 영국무대로 둥지를 옮긴 박주영은 팬들의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팀 내 입지를 굳히지 못하고 주전 경쟁에서 밀리며 출전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프리미어리그 17경기 동안 아직까지 공식 데뷔전도 치르지 못한 상황. 영국무대 진출 이후 칼링컵 3경기와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 1경기에 나서 1골만을 기록하고 있다. 설상가상 아르센 벵거 감독이 핵심 공격수 영입의사를 밝히고 있어 박주영의 존재감이 더욱 위협받고 있다. 계속되는 결장으로 경기력이 떨어지며 대표팀에서의 활약 여부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박주영은 “아직 신입생이고 배우는 단계”라며 위안을 삼고 있지만 그의 앞에 놓인 상황이 여의치만은 않다.



▲ 조광래

한국축구를 이끌어 오던 선장이 갑작스럽게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지난 7일 세상에 알려진 조광래(57) 감독의 갑작스런 경질은 12월 한 달 내내 축구계를 뒤흔들었다. 지난해 7월 대표팀 사령탑에 오른 조광래 감독은 ‘만화 축구’로 불리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기대를 모았다. 그러나 10여 년간 대표팀을 이끌어온 박지성(맨유)과 이영표(밴쿠버)의 은퇴는 조광래 감독의 전술운용에 상당한 타격을 입혔다. 대체 자원을 찾지 못하고 고심하는 사이 경기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해외파와 신예들을 기용하며 다양한 실험을 거쳤지만 오히려 역효과로 나타났다. 지난 8월 일본과의 평가전에서 0-3으로 참패를 당하며 팬들의 질타를 받았다. 이어 손흥민(함부르크) 부친의 차출 거부 논란에 휩싸이며 선수단 운영에 위기를 맞게 된다. 월드컵 3차 예선에서는 레바논에 충격의 1-2 패배로 최종예선 진출도 장담할 수 없게 됐다. 급기야 대한축구협회에서는 성적부진을 이유로 감독 경질이라는 초강수를 선택했다. 야심차게 출발했던 조광래호는 그렇게 17개월 만에 불명예스러운 막을 내렸다. 감독 경질 과정에서 불거진 졸속행정 논란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뒤 우여곡절 끝에 최강희 감독을 신임 사령탑에 올렸지만 불안감은 아직 남아있다. 게다가 축구협회가 조광래 감독을 보좌하던 코칭스태프와 잔여연봉 지급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어 대표팀을 둘러싼 잡음이 한동안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스포츠투데이 김흥순 기자 s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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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순 기자 spo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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