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오래된 연애가 그러하듯, 사랑이 빛을 잃고 그저 정으로 혹은 안락함으로 무심히 지나갈 수도 있었다. 잠깐 한 눈을 팔았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긴 시간이었고, 어느 순간엔 헤어질 법도 했다. 한데 이 남자, 류정한의 사랑은 여전히 넓고도 깊다. 굳건한데다 심지어 희망적이기까지 하다. 마흔하나, 그의 얼굴에 언뜻 소년의 얼굴이 비치는 것은 여전히 사랑을 믿는 그 마음 때문일 것이다. 그는 뜨겁고 묵묵히 그리고 처음의 설렘을 잊지 않은 채 그저 지금을 사랑할 뿐이다. 그것이 바로 류정한이 뮤지컬이라는 애인과 15년째 열애하는 법이다.
류정한과 함께 커 온 한국뮤지컬시장
류정한의 성장은 곧 한국뮤지컬시장의 성장이었다. 그는 1997년 클래식에 비해 레벨이 낮다고 치부되었던 뮤지컬시장에 홀연히 나타난 성악전공자였다. 고전적이면서도 안정적인 발성은 <로미오와 줄리엣>을 원안으로 한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 잘 들어맞았고, 소화할 이가 없어 음역대를 낮출 수밖에 없었던 레너드 번스타인의 곡은 그를 만나 비로소 원래 소리를 찾을 수 있었다. 정확한 발성과 가창력이 뮤지컬의 기본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류정한을 시작으로 김소현과 김선영, 민영기와 양준모 등이 등장하면서 시장에 더 많은 선택지가 던져졌다. 이후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라울”은 한일월드컵 기간임에도 ‘<오페라의 유령> 유료객석점유율 98%’라는 수치와 함께 찾아왔다. 성악도, 뮤지컬도 원해서 시작하지 않았지만 들어온 이상 늘 1등이었던 천재.
그러던 그가 “lover”를 버리고 반란을 꿈꾸기 시작한 건 2004년 <지킬앤하이드>에서였다. 테너와 베이스를 오가는 1인 2역에 국내에서 처음 시도되는 비극적 결말의 스릴러. 함께 캐스팅된 조승우에 비해 대중적 주목도는 낮았지만, 정갈하고 진중한 목소리의 지킬은 신사였고 천둥 같이 터져 나오는 탁성의 하이드는 그 자체로 공포였다. 오리지널 크리에이티브팀은 “지킬과 하이드 페이를 따로 다 줘라”는 말로 류정한을 인정했고, 브로드웨이에서도 실패한 <지킬앤하이드>가 한국의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오히려 그는 더 강하고 독특한 작품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늙은 기사 지망생(<맨 오브 라만차>)으로, 사랑을 위해 비수를 감춘 남자(<쓰릴 미>)로,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발사(<스위니 토드>)로. 공연당시 상대적으로 생소했던 작품들은 오로지 뮤지컬만을 고집해온 류정한의 성실함과 독특한 장르가 결합되어 힘을 얻었고, 그의 선택으로 시장은 다양성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지치지 않는 사랑이 가져올 다음 이야기
다가오는 2012년, 류정한은 다양성 이후의 스텝을 준비 중이다. 데뷔부터 현재까지 드라마틱한 사연의 중심에 있던 그가 <엘리자벳>을 통해 자신이 가진 몫을 서서히 나누고자 한다. 재능의 씨앗이 보이는 후배에게는 스포트라이트를, 드라마틱한 삶을 연기할 여배우에게는 커튼콜의 마지막 자리를 말이다. 엘리자벳의 어린 시절부터 그의 마지막순간까지 주위를 맴도는 ‘죽음(Tod)’처럼, 류정한은 소망한다. 보이는 존재이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 주인공을 빛내고, 시장을 든든하게 지탱하는 조력자로 남기를. 뮤지컬시장이 꺼질 듯 꺼지지 않는 거품으로 가득한 현재, 그리하여 “나이에 맞는 연기를 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하는 그의 선택은 다시 한 번 판을 흔들어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류정한의 힘이다.
돈키호테는 노래한다. ‘희망조차 없고 또 멀지라도 멈추지 않고 돌아보지 않고 오직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따르리라.’ 그가 거쳐 간 20여편 중 <맨 오브 라만차>를 아직 놓고 싶지 않은 작품으로 꼽는 이유다. 류정한은 돈키호테를 닮았다. 여전히 지치지 않고 행동하는 바로 그 라만차의 기사. 자신의 영달보다는 정의가, 자신이 속한 이 세계가 더욱 소중한 사람. 그리고 세상에서 뮤지컬을 가장 사랑한 남자. 그저 자신을 향한 수식어는 ‘뮤지컬배우’면 충분하다고 말하는 이 남자의 사랑이, 이 남자의 노래가 오늘도 마음을 적신다. 되도록 더 긴 시간, 더 많은 작품으로 우리 곁에 있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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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장경진 three@
10 아시아 편집. 이지혜 sev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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