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천국> 공개방송 현장
전생에 무슨 죄를 그리도 많이 지었기에 이토록 무거운 천형을 안고 태어났는지 모르겠다. 오늘도 ‘라천민’이라 불리는 어떤 무리들은 잠들지 못한 새벽, 두 시간씩 라디오 앞에서 웃고 운다. 그리고 해가 뜨면 멀쩡한 모습으로 변신해 아무렇지 않게 학교에, 직장에 간다. 그렇게 각자의 자리에서 정체를 숨긴 채 살아가던 이들이 10월 어느 저녁, 성남 모처에 운집했다. 대외적인 행사명은 ‘<유희열의 라디오천국> 첫 번째 공개방송 Thank You.’ 고품격 음악 공연으로 치장했지만 속속 모여드는 사람들의 범상치 않은 기운으로 보건데 이건 그냥 공개방송이 아니다. 그래서 <10 아시아>에서 르포 취재에 나섰다. 도대체 이들은 누구인가, 여기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하지만, 잊지 말자. 당신 옆 자리의 일 잘 하고 멋진 동료도, 취재에 나선 기자도, 알고 보면 정체를 숨긴 ‘라천민’일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의 정체를 어떻게 알 수 있냐고? 이 글을 읽고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라천민’이 아니다. 이 사진을 보며 “으흐흐흐”하고 새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 하는 당신이 ‘라천민’이지!!
“제가 ‘나는!’ 하면 ‘행복하다!’ 하고 외치세요. 나는!” “행복하다!!!” 분명 KBS <유희열의 라디오 천국>(이하 <라천>)의 처음이자 마지막 공개방송이라 알고 왔건만 이거 뭔가 분위기가 심상찮다. 흡사 사이비 종교의 부흥회를 방불케 하는 이상한 공기가 맴돈다. 자신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라하는 관객들을 보며 유희열은 만족한 듯 앙상한 어깨를 들썩이며 한참을 웃는다. 아닌 게 아니라, 그가 말을 내뱉을 때마다 성남아트센터 앙상블씨어터를 가득 채운 수백 명의 여성들은 환호를 넘어선 ‘괴성’을 질러댄다. 차가운 도시의 지성인들이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나마 느긋하게 여유를 즐길 만한 고품격 음악공연을 기대했던 건 정말 나뿐이었나. 게다가 여기 모인 이들이 ‘라천민’인가 뭔가라는데, 정확한 뜻은 모르겠지만 가까이 하면 안 될, 불가촉 ‘천민’을 의미하는 거라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유희열로부터 “직접 뵈니까 왜 (애인이) 없는지 알겠네요”, “정수리에서 밭 매는 냄새 나는 분들이에요” 같은 모욕을 당하고도 자존심도 없이 웃는 걸 보니 말이다.
이상한 건 관객들뿐만이 아니다. 여기서는 잘 나가는 뮤지션들도 바보가 되는 건지 십센치의 패션왕이자 보컬왕인 윤철종은 해괴한 시낭송을, 루시드폴은 ‘라디오 천국’이라는 다섯 글자로 유희열이 배꼽을 잡고 비웃을 만큼 어울리지 않는 오행시를 들려준다. 하긴, 노래를 불러봤자 칭찬 한 마디 못 들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대는 나지막히’를 부른 루시드폴이 무대 뒤로 사라지자마자 유희열은 “저건 노래가 아니라 숨이잖아요, 숨”이라고 비웃는다. 그렇지만 당신이 피아노를 치며 부른 ‘즐거운 나의 하루’도 그리 훌륭한 보컬은 아니었...흠흠. 이 와중에 심야지성의 상징 이동진 기자와 촌철살인의 카리스마 임경선이 그나마 품격을 지켜줄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들마저 사회적 지위를 내려놓고 치명적인 가창력을 선보인다.
그런데, 이상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 이상한 모임에 슬슬 적응이 되기 시작한다. “저는 (야한) 그림 자주 그리거든요. 제 그림을 제가 보고 흥분하고 그래요”라는 유희열의 저질스럽기 짝이 없는 말에 무의식적으로 발을 구르며 괴성을 지르고, 한 ‘라천민’이 뽐내는 괴상한 리코더 연주에 힘껏 박수까지 치게 되는 것이다. 심지어 가래가 끓는 목소리로 “다 이뤄져라~ 그란데 알레 뾰로로옹~”이라 외치는 정재형의 주문을 들으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만세라도 하고 싶다. 이거, 뭐야. 엄마, 나 무서워. 마지막으로 유희열을 비롯한 전 출연자들이 함께 부르는 토이의 ‘뜨거운 안녕’을 들으며 그제야 깨달았다. 내 안에 흐르는 ‘라천민’의 피가 이 이상한데 매력적인 블랙홀로 나를 인도했음을. 그래서 10월 27일, 그 날 밤의 세 시간이 이상하리만큼 순식간에 지나가버렸음을. 그리고 한 동안 다시 오지 않을 이 시간을 오래도록 그리워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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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김희주 기자 fifteen@
10 아시아 글. 황효진 기자 seventeen@
10 아시아 사진. 채기원 ten@
10 아시아 편집.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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