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비맥주 백우현 브루마스터가 말하는 맛의 진실
맥주 애호가들이 외도를 하고 있다. 생김새가 전혀 다른 술이 아니라 태생이 다른 맥주에 마음을 뺏겼다. ‘국산 맥주 향한 일편단심이야 변할 줄이 있으랴’ 했건만 수입맥주 앞에선 장사가 없다. 쌉쌀하고 독특한 맛 때문에 끌린단다. 뒤이어 국산 맥주에 대해 ‘밍밍하고 맛없다’ ‘맛이 다 똑같은 것 같다’고 말한다. 정말일까. 오해와 진실을 가리기 위해 맥주의 달인을 찾았다.
달달하니 좋구나, 은은하게 퍼지는 캐러멜 맛. 바나나 향 끝에 감도는 얕은 쓴맛. 과일과 어우러진 초콜릿 맛. 오렌지 껍질 향이 나기도 한다. 어라! 이건 곡물향인가 싶다. 달콤 쌉싸래함과 청량감, 상큼함은 덤으로 느껴진다.
독일의 ‘벡스다크’와 ‘에르딩거’, 아일랜드의 ‘기네스’, 벨기에의 ‘호가든’, 네덜란드 ‘하이네켄’…. 수입 맥주 얘기다. 저마다 개성 있는 맛과 향에 선택부터 경우의 수가 많아 인기가 높다. 최근 해외여행객·유학생이 증가하면서 소비자의 입맛이 다변화된 영향도 있다.
이는 맥주 소비 트렌드까지 바꿨다. 해외 맥주 수입량은 5년 새 2배로 늘었다. 요즘은 지구촌의 다양한 맥주를 대형 할인점과 호프집 등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국내 맥주시장 전체로 보면 아직 수입 맥주 점유율은 3%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그 기세가 국내 맥주 시장을 술렁이게 했다.
여기서 잠깐. 수입 맥주들 맛을 보니 국산 맥주가 싱겁고 맛이 없는 듯하다. 아닌 게 아니라 품질이 떨어져서 그런 건 아닐까 의심이 뒤따른다. 그래서 찾아갔다. 올해로 맥주의 달인 28년. 백우현 오비맥주 브루마스터 겸 전무다. 맛과 향, 깊이와 폭을 일일이 재면서 평가하는 맥주 양조 기술자다. 수입 맥주의 상승세에 대적해 돌풍을 일으킨 ‘OB골든라거’를 빚어낸 사람이기도 하다. 지난 13일 그와 아침부터 알딸딸한 인터뷰를 가졌다.
맛을 따지기에 앞서 맥주에 대한 기본기부터 다지기로 했다. 백 전무에게 “맥주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거냐”고 물었다. “보리를 싹틔운 맥아, 홉, 물 등의 원료를 끓여 추출한 엑기스에 효모를 첨가해 발효시킵니다. CO2와 알코올이 생기면 저장, 숙성해 맥주가 되는 것이죠. 보통의 맥주 알코올 농도는 4.5% 정도예요.” 그중에서도 맥주 맛을 이해하려면 배경지식을 좀 알아야 한다.
유럽은 ‘상면 발효’ 한국은 ‘하면 발효’
맥주 제조 방법은 맥주통 위쪽 효모가 발효되는 ‘상면 발효’와 맥주통의 아래쪽 효모가 발효되는 ‘하면 발효’로 나뉜다. 상면 발효는 맛과 색이 짙고 강한데 영국의 에일 맥주가 대표적이다. 하면 발효의 경우 깔끔하고 상쾌한 맛이 나며 하이네켄과 미국 맥주 ‘밀러’가 이에 속한다.
대다수의 국산 맥주가 하면 발효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그는 “국산 맥주가 밍밍해서 맛이 없다는 건 바로 제조 방법의 차이에서 비롯된 오해”라고 잘라 말했다. “한국 소비자들은 대부분 깨끗하고 부드러운 하면 발효의 미국식 라거(Lager) 맥주에 익숙해 있고 또 선호해요. 시장 전문 조사기관 시노베이트가 최근 몇 년간 실시한 ‘한국 소비자가 중요시 하는 맥주 속성’에서도 이와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알코올 도수가 높고 진한 맛이 특징인 유럽풍 상면 발효 맥주를 좋아하는 이들에겐 국산 맥주가 상대적으로 싱겁다고 느껴질 수밖에요.” 상면 발효 맥주는 분위기에 맞춰 특별하게 마시는 양주요, 하면 발효는 편히 즐기는 소주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 거란다.
결국 개인의 기호와 취향에 따라 맥주 맛도 천차만별인 데서 오는 주관적 견해일 뿐이라고. 백 전무는 국산 맥주가 맛이 없다든가 수입 맥주가 더 맛있다는 판단은 잘못된 것이라고 못 박았다.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또 있다. 국산 맥주와 수입 맥주 간 비교 품평이 품질 문제로까지 번질 때라고 했다. 첫 번째는 주원료인 맥아 함량이 부족한 게 아니냐는 시비다.
독일은 16세기에 정해진 맥주 순수령에 의해 맥아 100% 사용을 의무화했다. 일본의 경우 맥아 함량이 66.7% 이상이어야 맥주로 인정한다. 반면 우리나라는 주세법상 맥아 함량이 10%만 넘으면 맥주로 분류한다. 하지만 이는 법률상의 기준이지, 실제 맥아 함량으로 오인하지 말라는 것. 그는 국산 맥주의 대부분은 맥아 함량이 60% 이상이며 100%에 가까운 맥주도 있다고 역설했다.
두 번째는 국내 맥주회사의 제조 기술이 떨어지기 때문이라는 비판이다. 역시 사실과 다르다고 고개를 젓는 그다. 오비맥주의 경우 이미 1990년대 하이네켄, 레벤브로이, 칭타오 맥주 등 다양한 브랜드 생산 경험과 기술력을 선보인 바 있다. 지금도 해외 유명 맥주인 호가든과 버드와이저를 국내 공장에서 생산한다.
하이트맥주 또한 칼스버그 맥주를 생산한 노하우를 보유했다. “원료나 제조 기술 문제가 아니에요. 국내 맥주사들이 대다수의 소비자가 언제나 즐겨 마실 수 있는 제품 공급에 주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본은 같지만 소비자 취향 따라 미묘한 차이
국산 맥주와 수입 맥주 간의 맛에 대한 논란은 오해의 소지를 풀었다고 치자. 그래도 간과할 수 없는 게 있다. 국산 맥주의 진짜 경쟁자는 소비자의 ‘변심’이다. 수입 맥주가 국내 소비자들을 사로잡으면서 국내 맥주 브랜드도 변신에 나서는 이유다. OB골든라거는 그 선봉장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출시 113일 만에 5043만병(330mL기준)을 판매해 돌풍을 일으켰다. 수입 맥주를 겨냥해 100% 보리 맥주이면서 100% 독일호프, 골든몰트(황금맥아)로 깊고 풍부한 맛을 구현한 프리미엄급 ‘정통맥주의 귀환’을 표방했다. 맥주 명가 오비의 정통성을 이으면서 새로운 소비자 입맛에 걸맞은 명품 맥주를 지향한다.
“OB골든라거는 소수의 취향에 맞춘 맥주예요. 음미하면서 고급스럽게 마실 수 있는 술이 OB골든라거라면 친구들과 여럿이 어울려 즐기는 술이 카스예요. 선호도 40%가 넘는 대중적인 카스와 장르 자체가 다른 것이죠.” 요즘 개발하고 있는 새로운 맥주가 있을까. 그는 “프리미엄 맥주 시장을 바라보고 투자를 강화해나갈 계획”이라고 귀띔했다.
오비맥주의 맛과 품질을 오랫동안 책임져 온 백 전무에게 연구자로서 갖는 ‘맥주 철학’을 물었다. “오비의 전통 계승과 품질 최우선, 소비자 지향이 핵심 가치입니다. 20년 이상 된 수많은 브루마스터들의 장인 정신 또한 빼놓을 수 없죠. 우리 구호가 ‘정품’이예요. 장인으로서 제대로 된 맥주를 만들자는 겁니다. 이건 경쟁사보다 우위에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는 ‘맥주는 과학’이란 지론도 툭 내어 놓는다. 맥주가 미사일보다 만들기 더 어렵단다. 오감으로 맛봐야 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과학적 분석도 빼놓을 수 없어서다. 매일 아침마다 전날 만든 맥주들을 마셔보고 맛을 테스트하며 제조 기계에 대한 분석도 꼼꼼히 한다.
이렇게 온갖 정성을 쏟아서인지 맥주에 소주나 위스키, 보드카 등을 섞어 폭탄주로 ‘훼손’해서 마시는 사람들을 볼 때면 억울한 입장이라고 한다.
이코노믹 리뷰 전희진 기자 hsm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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