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BS이사회, 세르지오 에르모티 CEO직무대행으로 선임
[아시아경제 김영식 기자] 파생상품 부문 트레이더의 미승인 거래로 손실 23억달러의 ‘날벼락’을 맞은 스위스 최대 은행 UBS의 오스발트 그뤼벨 최고경영자(CEO·67)가 결국 사퇴했다. UBS 이사회는 24일 싱가포르에서 회의를 열고 그뤼벨 CEO의 사임을 공식 발표했다. 또 유럽·중동·아프리카지역 사업부문장 세르지오 에르모티(51)를 직무대행으로 지명하고 후임자 물색에 나섰다.
카스파르 빌리거 UBS이사회 의장은 성명을 통해 “그뤼벨 CEO는 UBS의 재정기반을 다지고 성장세를 상승반전시키는 등 성과를 통해 UBS를 세계에서 가장 탄탄한 은행 중 하나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면서 “그의 업적에 경의를 표한다”고 밝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그뤼벨 CEO가 사임할 뜻을 강력히 표명했으며 UBS 이사회가 즉각 사임을 만류했지만 본인의 의사가 확고했다고 전했다.
UBS는 23일 싱가포르에서 정례 이사회와 경영진 회의를 열고 이번 트레이딩 손실 사건과 그뤼벨 CEO의 거취, 투자은행 부문의 향후 방향 등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는 그뤼벨 CEO의 거취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지 못했고 24일 콘퍼런스콜을 통해 의견을 최종 조율한 뒤 그뤼벨의 사의를 수용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뤼벨은 옛 동독지역 출신으로 2차대전 당시 부모를 잃은 뒤 할머니를 따라 서독으로 이주해 성장했다. 은행에서 사회경험을 시작한 그는 도이체방크와 크레디스위스 그룹에서 37년을 보내고 은퇴했다가 지난 2009년 2월 세계금융위기로 기울어진 UBS의 회생을 위해 합류했다. 그는 7500명을 감원하는 등 구조조정으로 UBS를 가까스로 살려냈지만 리스크가 큰 투자를 억제해 채권시장 붐을 놓치는 우를 범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이번 사건으로 그는 50년 동안 걸어온 금융인의 삶을 마치게 됐다.
빌리거 UBS이사회 의장은 “차기 CEO 자리에는 현재 대행직을 맡은 에르모티도 유력 후보지만 이사회는 내년 봄까지 시간을 두고 물망에 오른 내·외부 인사 모두를 검토해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에르모티 신임 CEO직무대행은 기자회견에서 “UBS는 지금 어려운 시기를 맞았으며 이같은 사고는 이번 한번으로 끝내야 한다”면서 “사고의 재발을 막기 위해 UBS의 운영 위험성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스위스 출신인 에르모티는 1960년생으로 영국 옥스퍼드대학에서 최고경영자과정(AMP: Advanced Management Program)을 마친 금융전문가다. 1987년 메릴린치에 입사해 18년간 여러 직무를 거친 후 2001년부터 2003년까지 글로벌증권시장담당 공동대표와 투자은행부문 이사직을 맡았다. 2005년 이탈리아 유니크레디트은행 투자은행부문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2007년부터 2010년까지 부대표를 맡았으며 2011년 4월 UBS에 합류했다. 알레산드로 프로퓨모 전(前) 유니크레디트 CEO는 “에르모티가 금융시장에서 쌓은 경험은 그의 성공에 밑거름이 될 것”이라면서 “그는 투자은행 부문을 매우 잘 아는 인물”이라고 말했다.
UBS는 지난 15일 런던지사의 ‘델타 원(Delta 1)’ 트레이딩 부서 소속 ETF 트레이더 크웨쿠 아도볼리(31)의 미승인 거래로 손실을 냈다고 밝혔다. 조사 결과 그는 미국 뉴욕증시 S&P500지수, 독일 DAX지수, 유로스톡스지수 선물 등에 승인절차 없이 상당한 액수를 무단투자해 손실을 낸 것으로 나타났다. 이 사고로 UBS는 3·4분기 실적에서 손실을 피할 수 없게 됐고 UBS의 리스크관리 능력에 대한 시장의 불신도 커졌다. UBS의 트레이딩 손실 사고는 가뜩이나 유로존 재정위기로 돈줄이 마른 유럽 금융권에도 악재로 작용했다.
우선 투자자들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다. 블룸버그통신은 “에르모티의 과제는 투자은행 부문 규모를 과감히 줄이는 한편 UBS 전체 매출의 41%를 차지하는 자산관리 사업부문을 강화하는 것이 될 것”이라면서 “고액자산 고객들의 이탈을 막는 것이 시급하다”고 보도했다.
에르모티는 기자회견을 통해 “투자은행 부문 리스크가 반드시 실적 부진으로 직결되지는 않는다”면서 “이번 트레이딩 손실이 UBS 임직원들의 보수나 일자리 감축까지 영향을 미칠 것인지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말했다.
시장 전문가들의 의견은 UBS가 투자은행 부문을 축소하거나 폐지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스위스 함메르파트너스의 엔리코 라치오피 애널리스트는 “UBS는 사업모델을 사실상 상실했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하며 파생상품 부문 거래를 중단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스위스계 금융컨설팅업체 헬베아 런던지사의 피터 쏜 애널리스트도 “투자은행 사업전망을 바꿔야 하며 어떻게든 축소를 피할 수 없다”고 말했다.
스위스 주식시장에서 UBS의 주가는 트레이딩 손실 발표 이후 7.4%, 올해 34% 떨어진 상태다. UBS의 투자은행 부문은 올해 상반기 매출에서 33억달러에 이를 정도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를 축소할 경우 올해 3500명 감원에 이어 추가 인력 감축이 뒤따르게 된다. 또 UBS의 투자은행 부문은 아시아지역에서 상당한 강세를 보여 왔기에 투자은행 포기는 경쟁 은행들에게 밀리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김영식 기자 gr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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