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태상준 기자] 가을 빛 햇살이 눈부시던 9월의 어느 날 피아니스트 손열음(27)을 만났다. 아침 일찍부터 실내악 리허설 중이었다던 그는 몸은 바쁘지만 마음은 편하다며 밝게 웃었다. 1999년 오벌린 국제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하면서 국내외 음악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그 후로도 2002년 비오티 국제 콩쿠르, 2005년 루빈스타인 국제 피아노 콩쿠르, 2009년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 등, 세계 유수의 국제 콩쿠르에서 연이어 상위 입상하며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쳐 오던 손열음의 경력에 올해 6월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 피아노 부문 2위 입상자라는 타이틀이 새로 추가되었다.
'잘해야 본전' 일수도 있었던 도전이었다. 하지만 입상자에게는 많은 연주 기회가 주어진다. 그래서 참가를 결정했다고 했다. 만약 떨어지더라도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니까 부담감도 없었다는 손열음은 이제 출발선에 섰을 뿐이라며 담담한 표정이었다. 손열음의 이번 입상은 1974년 정명훈이 한국인 최초로 이 대회에서 2위 입상을 한 이래 37년 만의 일이다. 당시 정명훈은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 퍼레이드를 했을 정도로 전 국민이 그의 수상소식에 열광했었다.
이 둘이 같은 무대에 선다니 귀가 솔깃하다. 게다가 이번에는 지휘자와 협연자가 아니라 음악 감독과 연주자로 만난다. 손열음 역시 이 '7인의 음악인' 연주회(9월 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거는 기대가 크다. 사실 이 가을에 세계적으로 활약하고 있는 첼리스트 송영훈과 바이올리니스트 이유라와 함께 슈베르트의 피아노 3중주 내림 나장조(Schubert, Piano Trio No.1 in B flat Major, D.898)를 연주한다니 흥분할 만 하다. 슈베르트의 이 피아노 3중주 곡은 그녀가 워낙 좋아하는 곡이라 연주곡목을 전달받았을 때 기뻐서 어쩔 줄 몰랐다고 한다. 그는 슈베트르의 피아노 3중주 곡이 약 39분 정도로 다소 연주 시간이 길다는 것이 유일한 단점이라며 웃는다. 확실히 손열음은 행복해 보였다.
손열음에게 있어 음악은 행복이다. 무대에 서는 것이 즐겁고, 연주가 재미있고 곡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음악을 그려가는 순간이 행복하다. 연주가 만족스럽지 못해서 속상할 때는 있지만 음악 때문에 괴로웠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이미 어린 시절에 다른 어떤 공부보다도 음악이 재미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던 그는 숨을 쉬듯 언제나 음악을 듣고 있다. 연주곡을 연습할 때에도 실제로 피아노 앞에 앉아서 건반을 두드리는 시간보다, 귀로 들으며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시간이 훨씬 더 길다.
손열음 안에는 연주자로서의 손열음과 고전 음악 음악 애호가로서의 손열음이 공존한다. 그는 각각의 입장에서 음악을 듣고 평가하고 분석하며 이미지를 그린다. 그렇기에 그토록 음악이 재미있는 게 아닐까? 그의 연주에서 또렷하게 드러나는 단정한 균형감각은 어쩌면 이 두 손열음의 공동작업에 의한 결과다.
그의 이름 앞에는 흔히 '토종 영재'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고향인 원주에서 일반 중학교를 마치고 열다섯에 한국예술종합대학교에 조기 입학, 졸업과 동시에 독일로 유학을 떠나 현재 하노버 대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라는 범상치 않은 경력 때문이다. 그는 한국과 독일의 영재교육에 어떤 차이가 있다고 보고 있을까? 한국이나 중국 등 동양권에서 온 학생들은 뛰어난 테크닉을 자랑하지만 더 큰 그림을 그려가는 상상력이나 창의력 면이 좀 부족하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물론 머릿속에 만들어진 음악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테크닉은 중요하다. 하지만 전달할 음악이 없다면 아무리 테크닉이 뛰어나다 해도 아무런 의미도 가지질 못한다. 그렇기에 이 음악적 상상력과 창의력이야말로 음악가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자산이라는 것이다. 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우선 많은 경험을 해야 한다는 것이 손열음의 지론이다. 흔히 사랑을 경험해보라고 하지만 그 뿐만이 아니라, 서양음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학도 필요하다고 그는 조언한다. 바람 냄새, 온도, 석양이나 밤하늘의 색깔 같은 자연환경에서부터 언어, 문화에 이르기까지, 그 음악이 탄생한 환경 속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보다 풍성한 음악적 상상력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그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하지만 계획을 세워봤자 항상 계획대로 흘러가는 것은 아니므로, 장기적인 계획 같은 건 잘 세우지 못한다는 말이 돌아왔다. 우선은 눈앞에 다가온 실내악 연주회를 잘 끝내고, 앞으로도 좋은 연주를 계속 들려주고 싶다고 했다. 어지간한 국제 콩쿠르는 입상을 했건 떨어졌건 한번씩은 다 나가봤으니, 이제 더 이상 콩쿠르 참가는 없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손열음은 요즘 실내악의 매력에 푹 빠져 있는 듯 했다. 청중과 연주자가, 그리고 연주자와 연주자가 서로 소통하며 음악을 만들어가는 실내악이야말로 청중이자 연주자이기도 한 자신을 가장 만족시킬 수 있는 연주 형태라는 설명을 들으면서 그의 균형 감각이 이번 연주회에서는 어떻게 빛을 발할지 궁금해졌다. 열매를 맺으라고 부모님이 지어준 그 이름처럼, 그가 맺은 열매가 가을 햇살 속에 더욱 크고 아름답게, 향기롭게 익어가길 기대한다.(장소협찬_콩두(豆)이야기)
태상준 기자·이나경(고전음악컬럼니스트) birdcage@
사진_이준구(AR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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