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경제 태상준 기자] 국내에서 공연되는 연극과 뮤지컬에서는 대개 같은 역할을 여러 명이 번갈아 연기한다. 두 명일 땐 더블 캐스트(Double Casting), 세 명일 때는 트리플 캐스트(Triple Cast)라고 하며, 가끔은 동일한 역할을 다섯 명 이상의 배우가 연기할 때도 있다. 공연 기간 동안에 각기 차별되는 버전을 내놓아 최고의 수익을 뽑으려는 제작사의 위험 분산(Diversifications of Risk)과 모든 공연을 다 커버할 수 없는 주·조연 배우들의 빽빽한 스케줄 덕분이다.
‘폴링 포 이브’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아담 역은 봉태규, 홍희원, 이동하 세 명이 번갈아 연기하며, 이브나 남자·여자 신(神)도 상황은 같다. 그러나 유독 남자천사 미카엘은 단 한 사람, 정상훈(36)이 연기한다. 사실 정상훈은 언제나 그래왔다. 2010년 한국 초연된 브로드웨이 뮤지컬 ‘스팸어랏’에서 정상훈은 유일한 란셀롯이었으며, 다른 연극과 뮤지컬에서도 그는 시즌 내내 공연 없는 월요일을 제외한 모든 날 무대에 올랐다. 중년(OB)팀과 청년(YB)팀으로 나뉜 연극 ‘아트’나 1인 22역의 멀티맨으로 분했던 창작 뮤지컬 ‘김종욱 찾기’ 정도가 예외다. 특정 역할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만 만들고 싶은 배우 정상훈의 욕심과 다른 사람으로 절대 대체될 수 없는 그의 타고난 캐릭터 장악력이 그 이유다.
거칠 것 없던 20대 초반 시절, TV 시트콤 ‘나 어때’(1998)로 데뷔한 정상훈은 다수의 무대와 TV 프로그램, 영화 단역을 경험한 스탠드 업 코미디언 출신이다. 군 제대 후 우연히 관람한 뮤지컬에 압도되어 TV에서 무대로 방향을 튼 정상훈은 무대 위에서 가장 빛나는 ‘잘 노는’ 자신의 모습이 무척 만족스럽다. 이제 데뷔 14년 차, 아직은 ‘화려한’ 주연이 아닌 ‘빛나는’ 조연 배우이지만 정상훈은 절대로 조바심내지 않는다. 평생을 연기자라는 이름으로 불리길 바라는 정상훈에게 시간은 아직 많이 있다.
태상준 기자 birdcage@
사진_이재문 기자 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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