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훈은 상처 입은 소년의 눈을 가졌다. 조인성의 해맑은 소년과 박해일의 불안한 청년이 공존하는 그의 진가는 올 초 개봉한 독립영화 <파수꾼>을 통해 확인됐다. 성장 속에서 분열, 소멸, 재배치의 과정을 겪는 남자 고교생들의 내밀한 심리를 그린 <파수꾼>을 거쳐 이제훈은 100억 원대 대작 전쟁영화 <고지전>에서 다시 한번 남자들의 세계 속에서 트라우마와 싸우는 소년을 연기했다. 스무 살의 나이에 악어중대 2소대를 이끄는 신일영 대위 역이다. <친구사이?>를 비롯한 몇 편의 단편영화와 드라마 <세 자매>, <파수꾼> 등으로 제법 얼굴을 알렸지만 아직 이제훈은 신인 배우다. <고지전>이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배우로서 재능에 대해선 이미 검증을 마쳤지만 대중과의 교감은 다른 차원이기 때문이다. 이제훈은 어려서부터 내재돼 있던 재능을 뒤늦게 한꺼풀씩 꺼내놓고 있는 중이다. <파수꾼>과 <고지전>의 인물들과는 정반대의 밝은 미소가 인상적이었던 배우 이제훈을 만났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하고 싶은 걸 해보고 싶었다”
<#10LOGO#><고지전> 개봉 전이니 <파수꾼> 2만 명 돌파부터 축하한다.
이제훈: 2만 명은 못 넘을 줄 알았는데 정말 놀라웠다.
<#10LOGO#><파수꾼>에서 자신이 봐도 잘했다고 생각하는 장면은?
이제훈: 내가 연기하고 내가 깜짝 놀란 부분이 있다. 꽃꽂이 얘기 하다가 배재기를 뒤로 끌고 가서 무슨 얘기했냐고 물으며 시선 주고받잖나. 기태가 어떤 아이인지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10LOGO#><파수꾼>을 보니 리더의 기질이 보인다. 심상치 않은 눈빛도 그렇고. 어릴 때부터 그런 기질이 있었나. 인기도 많았을 것 같다.
이제훈: 어릴 땐 극성 맞고 개구쟁이였는데 오히려 초중고 지나면서 차분하고 얌전해졌다. 친척 분들도 “네가 이렇게 얌전하게 클지 몰랐다”고 신기해 할 정도다. 학창 시절에 인기가 있지는 않았다. 활발하게 뭔가를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냥 시키면 빼지 않고 하는 정도?
<#10LOGO#>내성적이었으면 연기를 하겠다는 마음을 먹기 쉽지 않을 것 같은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이제훈: 어렸을 땐 남들 앞에서 장기자랑하고 노래 부르고 춤추는 것을 즐기다가 나이가 들면서 그런 게 점점 없어졌다. 그런데 안에는 그런 걸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뭔가 남들의 이목을 끌면서 박수 받는 것, 남들이 좋아해 주는 모습에 희열을 느꼈다. 고3 때 진로결정을 하며 ‘그래, 연극영화과로 가자’ 했는데 집에서 별로 좋아하시지 않더라. 나도 그때 확고한 의지가 부족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대학교 와서 동아리 활동을 하게 됐다. 처음에는 연극동아리에 들어가야지 생각했는데 결국 댄스동아리에 들어가 활동하게 됐다.
<#10LOGO#>연기에 대한 열정은 잊어버리고?
이제훈: 그것도 어떻게 보면 무대 위에서 춤추는 거니까. 그래서 오히려 댄스동아리 할 때는 연기에 대한 생각이 그렇게 크진 않았던 것 같다. 학교를 다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건 뭘까? 하고 싶은 건 뭘까? 그게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가만히 두게 할 수 없더라. ‘그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젊은 나이에 해보고 싶은 걸 해본다는 게 어디냐’ 하는 생각에 과감하게 휴학하고 연기학원부터 갔다.
<#10LOGO#>부모에겐 거짓말하고?
이제훈: 어머니에겐 얘기했다. “연기학원 가겠다. 그러나 손은 벌리지 않겠다”고. 그러다 극단에 들어가서 연기를 배웠다. 그때가 스물셋인가 스물넷쯤이었다. 오디션 봐서 뮤지컬 무대에도 서기도 했다.
<#10LOGO#>역시 춤과 노래가 연기와 함께 따라다녔던 듯하다.
이제훈: 그런 것 같다. 세트였네.
<#10LOGO#>표현의 욕구를 늘 갖고 있으면서도 중고등학생 땐 몰랐던 건가?
이제훈: 엄두를 못 냈던 것 같다. 연극과 뮤지컬에 출연하고 연기를 배우면서도 중간 중간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혔다. 이걸로 제대로 밥 벌어먹고 살 수 있을까 걱정했다. 집안에 아들은 나 하나인데 내가 하고 싶은 걸 고집하느라 효도를 못하는 게 아닌가 걱정되기도 했다. 그런데 연기를 버리기는 쉽지 않더라. 계속 하고 싶었고 하면 할수록 더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연기로서 인생을 걸어보겠다는 결심이 드는 순간 나 자신을 뒤돌아보니 아무것도 없는 것 같더라. 연기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것 같고 이론이나 기초가 너무 없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학교를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비슷한 생각을 가진 친구들과 같이 연기를 배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국예술종합학교에 가게 됐다.
<#10LOGO#>아르바이트도 많이 했나?
이제훈: 많이 했다. 인력사무소에 새벽에 찾아가 일용직 노동을 하기도 했다. 먼저 온 순서대로 가는, 어디로 갈지 모르는 일이었다. 공사장에 가서 벽돌을 나르기도 하고 한번은 큰 터널 청소를 한 적도 있다. 한겨울에 자동차 공장에서 새 차를 물청소하고 세심히 닦는 아르바이트도 했다. 마지막으로 한 건 커피전문점에서 서빙하고 캐셔 보는 일이었다. 커피를 너무 좋아해서 하고 싶은 일이었다.
“뻔하지 않은 것이 좋다”
<#10LOGO#>음악 취향도 다양하고 영화를 보는 취향도 폭넓은 것 같다. 짧은 필모그래피 안에서 다양한 역할을 하게 된 것도 그런 맥락인 것 같은데.
이제훈: 그 말을 들으니 나에 대해 알 것 같다. 음악을 보더라도 다 좋아한다. 대중음악을 필두로 팝송도 많이 듣는다.
<#10LOGO#>작품 선택할 때 어떤 걸 먼저 생각하나.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먼저인가, 도전해 보고 싶은 것이 먼저인가.
이제훈: 그런 기준은 없다. 그저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것일 뿐이다. 어렵고 부담이 될 수 있는 역할에도 도전한다는 정신으로 부딪혔던 것 같다. 앞으로도 걱정이 된다. ‘내가 과연 어떤 작품에서, 어떤 모습의 캐릭터를 만나게 될까.’ 설레는 부분도 있지만 두려움도 있는 것 같다. 그걸 극복해야지 좋은 배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잘할 수 있는 것만 하면 재미는 없을 것 같다.
<#10LOGO#>드라마를 보며 탐나는 역할이 있었다면?
이제훈: <시크릿 가든>?
<#10LOGO#>김주원(현빈) 역할?
이제훈: 전부 다. 길라임까지. 어떻게 보면 뻔할 수 있는 이야기를 어쩌면 이토록 창의적이고 새롭게 만들 수 있을까 놀라웠다.
<#10LOGO#>학창 시절엔 어떤 영화를 좋아했나.
이제훈: 중학생 때는 한국영화 중에서 강렬하게 왔던 게 <초록물고기>였다. 미성년자는 보면 안 되는 건데.(웃음) 처음 보고 아주 놀라웠다. 이해를 할 수는 없었는데 자꾸 생각이 나고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내게 남기더라. ‘이게 뭐지?’ 하면서 기억에 오래 남았다. 중학생 때 많은 작품을 봤다. 사람들이 한국영화를 안 볼 때 나는 한국영화를 봤다. 한국영화를 <쉬리>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쉬리> 이전의 영화들도 많이 챙겨봤다. 박신양 선배의 <유리>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보통 어느 배우 연기를 보고, 어느 작품을 보고 영감을 얻어서 배우가 되겠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게 없었다.
<#10LOGO#>영화건 음악이건 독특한 걸 좋아하나 보다.
이제훈: 맞다. 거두절미하고 뻔하지 않은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10LOGO#>관심사를 공유하는 친구는 있었나?
이제훈: 없었다. 주위에 예술하는 친구나 연기하는 친구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나서는 것에 있어서 용기가 없었던 것 같다. 주위엔 다들 공부하는 친구들이었으니까. 중학생 땐 돈만 생기면 신해철의 앨범을 샀다. ‘일상으로의 초대’가 나왔을 때부터 좋아했다. 그 전에는 존재만 알았지 음악은 잘 몰랐다. 무척 새로웠다. 주위에선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다. 나중엔 고등학교 가서 윤리 선생님과 윤도현-신해철에 대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웃음)
<#10LOGO#>생각이 많은 청년이었나 보다.
이제훈: 그런가 보다. 뭔가를 결정할 때도 쉽게 하지 않는다. 고민을 많이 한다. 심지어 옷을 하나 살 때도 즉흥적으로 사지 않는다. 물건을 하나 사는 데 있어서도 평생 갖겠다는 마음으로 산다.
<#10LOGO#>작품을 선택할 때도 평생 남는 작품을 하겠다는 마음인가.
이제훈: 내 자신을 돌이켜 봤을 때 후회가 안 남는 작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연기를 하는 매 순간 모든 것을 쏟아 붓는 이유가 내 인생을 돌이켜 보고 되짚어 봤을 때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다.
<#10LOGO#>어렸을 때부터 계속 일기를 썼다고 들었다. 특히 ‘나는 배우가 되면 Top3 안에 들겠다’라는 문구가 인상적이었다. 지금 생각하는 Top3는 누군가.
이제훈: 참 얼토당토않은 얘기를 썼다. (웃음) 너무 많아서 세 분을 꼽는 건 힘들다. 그냥 좋아하는 배우를 꼽는다면 하정우, 한석규 선배가 떠오른다.<고지전>에서 같이 한 신하균 선배도 좋아한다. <고지전>에 캐스팅됐을 땐 ‘내가 정말 그 사람과 같은 자리에서 연기를? 같이 밥을?’ 이럴 정도로 너무 좋았다.
<#10LOGO#>신하균의 연기를 옆에서 보며 배우고 싶은 점은 무엇이던가.
이제훈: 영화에서 하균이 형은 상황을 지켜보는 관찰자 입장이다. 자기가 주체적으로 행동하기보다 뭔가를 받아들이고 리액션 하는 부분이 많다. 매번 다르게 느껴졌다. 늘 어떻게 해석할까 궁금증을 갖게 한다. 옆에서 보면서 그런 면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고지전>의 신일영, 어린 아이의 모습을 잃지 않는 것이 숙제이자 고민”
<#10LOGO#>날씨나 현장 분위기, 배우 등 주변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이제훈: 맞다. <고지전> 현장은 심지어 휴대폰이 안 터지는 곳이었다. 연기를 하는 순간도 그렇지만 컷이 되고 좀 쉬어야 하는데 긴장을 놓지 못했다. 촬영이 끝나고 숙소에 들어가서 잠자리에 드는 순간까지. 신일영이라는 캐릭터가 외적으로 보여줘야 하는 모습이 있었기 때문에 돌아와서 팔굽혀펴기 하고 윗몸일으키기를 했다. 규모가 워낙 컸기 때문에 한 번에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처음이자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촬영했다. 그래서 여유가 좀 부족했던 것 같다.
<#10LOGO#>치밀하게 캐릭터를 분석해서 준비해간 뒤 현장에서 본능적인 부분을 섞어 연기하는 스타일 같다.
이제훈: 그런 방법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시나리오를 많이 보고 연기하지만 그걸 정답으로 생각하진 않는다. 항상 열어놓고 모든 걸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 어떤 분들은 자기가 연기하는 것에 대해 건드리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데 난 오히려 더 환영한다. 내가 생각하는 건 내 범주 안에만 속한 거니까.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자극이 내겐 연기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어찌 보면 그게 다일 수도 있다. 그래서 상대 배우가 중요한 것 같다.
<#10LOGO#><고지전>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느낌은 어땠나.
이제훈: 처음 보고 나니 ‘우와 이거 <공동경비구역 JSA>를 능가하네’라는 생각이 들더라. 봤더니 바로 그 작가님이었다. 정말 신기했다. ‘연출은 장훈 감독님? 진짜 하고 싶다!’ 하면서 오디션을 본 거다.
<#10LOGO#>신일영 캐릭터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나.
이제훈: 나이가 어린데 수많은 중대원들의 리더가 될 수 있는 이유가 뭘까. 카리스마와 통솔력을 갖고 부대를 이끄는데 왜 그래야만 했는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쟁터 속에 가장 먼저 뛰어들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영화 속에서 나온다. 악어 중대원들의 트라우마가 설명이 된다. 감독님이 생각한 건 인물들 중 가장 높은 계급에 중대장이지만 어디까지나 어린 아이의 모습을 잃지 말았으면 했다. 그게 내게 숙제였고 고민을 더 하게 된 지점이었다.
<#10LOGO#>캐릭터는 어떻게 만들어 갔나.
이제훈: 촬영 전 감독님과 얘기했던 시간이 어떻게 보면 오디션일 수도 있다. 3~4개월간 긴 시간 동안은 세 번 만났고 짧게는 자주 만났다. 그 시간에 캐릭터를 구축해나갈 수 있어서 오히려 촬영할 때는 큰 설명이 필요 없었던 것 같다. 기다리는 게 쉽지 않았고 힘들었지만 그 시간이 있어서 신일영이라는 인물에 깊게 다가가고 이해하며 연기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준비하면서 어렸을 때 내 모습이 어땠는지 많이 생각했다. 삶을 먼저 배우기 전에 죽음이라는 것을 보며 배운 인물이기 때문에 그런 깊이를 어떻게 내가 다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가볍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마음이 무거웠고 뭔가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촬영기간에도 뭔가 풀어져서 신나게 놀고 여유 있게 지내지는 못했다.
“완벽주의자이고 싶은데 못하는 게 너무 많다”
<#10LOGO#><파수꾼>, <고지전>의 인물들처럼 매서운 성격이 있나.
이제훈: 있는 것 같다. 내 안에 너무나 많은 게 있는 것 같다. 내가 모르는 모습도 있는 것 같고 세상을 살면서 하루하루 지내다 보면 나도 몰랐던 내 모습을 발견하면서 연기를 하는데 밑거름이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더 많은 경험을 하고 싶은 게 욕심이다.
<#10LOGO#><파수꾼>의 기태처럼 꼭 지키고 싶은 한 가지가 있다면?
이제훈: 진정성을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게 항상 내게는 베이스인 것 같다. 시나리오를 받더라도, 디렉션을 받더라도 거기에 기본적으로 진정성이 깔려 있어야 연기가 나온다. 그렇지 않으면 연기를 못 한다. 일단은 내 진정성보다는 나를 봐주는 사람들이 공감을 하면 더 좋겠다. 나를 보는 사람들의 만족이 더 중요하다.
<#10LOGO#>5년 후에 어떤 모습이 돼 있을 것 같나?
이제훈: 연기 하다가 만 사람도 있잖나. 연기는 놓지 않고 있을 것 같다. 다른 것에 한눈팔고 관심을 둘 수는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최우선 순위는 연기일 것 같다.
10 아시아 글,인터뷰. 고경석 기자 k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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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사진. 채기원 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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