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 윤. 진. 원.” 선임들의 눈빛에, 사소한 터치에 관등성명이 튀어나온다. “네, 아니오, 안다, 모른다, 네 단어만 말할 수 있는” 이등병이 하루에 외치는 관등성명은 수십 번일 것이다. 그런데도 선임들은 여전히 그에게 “너 이름이 뭐냐?”고 묻는다. 불심이 강해도 취사병이라면 칼로 동태를 내리쳐야만 하고, 아무리 좋아해도 신고식 자리에서는 라디오헤드의 노래를 부를 수 없다. 나이가 월등히 많아도, 사회에서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해도 무조건 늦게 들어오는 사람이 굽히고 들어가야만 하는 곳. 좋게 말하면 편견이 없고, 나쁘게 말하면 인격 대신 기능으로 쓰이는 곳. 게다가 제 마음대로 도망갈 수도, 죽을 수도 없는 곳. 대부분의 대한민국 남자라면 이름 대신 계급으로 불리며 내려올 수도 없는 그 무대에서 24개월짜리 연극을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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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군대, 직장 어디에도 파수꾼은 없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이것이 2006년 초연 이후 5년 만에 재공연 되는 연극 <삼등병>이 단순히 군대이야기로만 설명되지 않는 이유다. 진원은 1, 2, 3장을 거치며 이등병에서 일병을 거쳐 병장이 된다. 그리고 계급에 따라 변화하는 그의 모습은 학교와 직장 등 수많은 조직생활을 견뎌내야만 하는 관객들의 또 다른 얼굴이 된다. 역겨우리만큼 당하기만 하는 이등병, “지옥에서 만난 친구”와 라디오헤드의 음악으로 위로받던 일병, 금연을 권유하던 이가 담배를 물기 시작하는 상병, 특수한 상황 속에서 앞뒤 다른 말을 할 수밖에 없는 병장. 진원이 변해가는 과정은 이등병 시절 그가 조태기(이현균) 병장과 자주 했던 극중극 <파수꾼>과 닮았다. 자신들은 아무것도 지키지 않고 있다는 숨겨진 진실을 얘기하고자 했던 소년 파수꾼과 적당히 눈 감고 모르는 척 하는 노인 파수꾼의 이야기. 특히 예민한 감수성으로 군에 적응하지 못했던 진원이 어느새 조직에 순응해 상부에 전화를 거는 엔딩은 소년에서 노인 파수꾼이 되어버린 한 인간을 보여준다. 복잡다단한 눈빛 속에서 거짓이자 진실을 토로하는 진원의 모습은 그야말로 뼛속깊이 이해할 수밖에 없어 슬픈 비극이다.
그래서 <삼등병>을 보는 과정은 감정적으로 영화 <파수꾼>의 세 소년을 바라보는 그것과 흡사하다. 두 작품에는 군대와 남고라는 그동안 오해되어온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자기반성적 성찰이 모두 담겼다. 2년과 3년이라는 정해진 시간 안에서 우정과 배신, 억압과 해방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성장하는 인물은 관객에게 일종의 충격과 애잔한 슬픔, 그리고 긴 여운을 남긴다. 결국 그 시절을 이겨낸자만이 얻을 수 있는 전리품 같은 배우들의 ‘진짜’ 전역신고가 커튼콜에 등장하면 연극의 묵직한 주제의식과 함께 뭉클함을 자아낸다. 하지만 <삼등병>은 비속어와 사투리가 섞인 대사에 위트가 넘치는, 마냥 어둡지만은 않은 연극이기도 하다. 공연은 7월 10일까지 대학로 학전블루 소극장에서 계속된다.
사진제공.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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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장경진 thr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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