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볼일 없는 아이돌 키사라기 미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일 년이 되는 날이다. 그녀의 정보에 관한 한 절대지존을 자부하는 이에모토(김남진ㆍ김한)는 이제 한줌 밖에 남지 않은 키사라기 미키의 팬들을 소환한다. 참석한 사람은 이에모토를 포함해 다섯. 촌스럽고 눈치 없는 야스오(윤상호ㆍ최재섭), 껄렁껄렁하면서 귀가 얇은 스네이크(김민규ㆍ박정민), 무뚝뚝하고도 사나운 기무라 타쿠야(김원해ㆍ이철민)와 수상하기 짝이 없는 딸기 소녀(염동헌ㆍ김병춘) 사이에는 키사라기 미키의 오타쿠 삼촌팬이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어떠한 공통점도 존재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그녀를 기억하는 팬들 간의 조촐한 추모회로 시작된 이 모임은 “그녀는 타살 된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과격한 추리가 난무하는 소동으로 급변한다. 그리고 다섯 명의 남자들은 마음을 모아 키사라기 미키를 죽인 진짜 범인을 색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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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팬이 되어보지 않은 자, 모두 유죄
남자들은 솔직하다. 그들은 키사라기 미키가 노래에도, 춤에도, 연기에도 특별한 재능이 없음을 안다. 그저 “가진 것은 몸매뿐”이라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입을 모아 미키짱을 향해 외친다. “귀여워!” 타인의 시선, 세상의 잣대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들이 키사라기 미키를 사랑하는 이유는 어처구니없이 사소한 것들이다. 실수투성이지만 낙천적이고,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하며, 언제나 밝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 서로가 그 사실에 동의하는 순간, 그들에게 다른 사람의 이해는 필요 없다.
배타적이고도 맹목적이지만 무한히 순진한 그 마음은 지독한 짝사랑과 닮아있다. 그래서 이 연극은 결국 연애가 끝난 자리에 도착한 연애편지와 같다. 남자들은 연극의 전반부에 걸쳐 왜 그녀를 사랑했는가에 대해 말하고, 왜 그녀가 자신들을 떠나야 했는가를 고민한다. 그리고 연극이 끝내 밝혀내는 것은 그녀 역시 남자들을 사랑했다는 진실이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그 사실을 사랑하고 있었다. 하여, <키사라기 미키짱>이 위로하는 것은 허락 받지 않은 사랑에 바쳐진 모든 마음들이다. 도달할 수 있을 것인지 확신하지 못한 응원과 배려, 걱정과 보호 하나하나에 연극은 잘 도착했다는 확인 도장을 찍어 준다. 그리고 그것이야 말로 짝사랑이 돌려받을 수 있는 최고의 보상이라고 말한다.
2003년 일본에서 초연된 이 극본이 바로 지금, 이 땅에서 유효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키사라기 미키짱>은 다만 한국과 일본이 서로의 아이돌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되는 텍스트가 아니다. 이 연극은 조금 과장되고 왁자지껄한 방식으로 ‘남은 사람들’을 향해 보편적인 위로를 건넨다. 딸기소녀의 입을 통해 “진실은 주관적인 것”이라고 말하며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니라고 격려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작품은 결정적인 사실이 밝혀지는 후반을 제외하고는 내내 즐겁고 신난다. 미키팀은 김병춘, 이철민과 박정민의 나이를 뛰어넘은 앙상블을 비롯해 일본 연극 특유의 다이내믹함이 잘 살아 있고, 키사라기팀은 김원해의 카리스마를 중심으로 반전의 재미가 더 크다. 어느 쪽이든 원작자 코사와 료타의 한 눈 팔 수 없게 만드는 극작술을 맛보기에는 충분 하다. 8월 7일까지 대학로 컬쳐 스페이스 엔유에서 공연된다.
사진제공. CJ 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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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아시아 글. 윤희성 n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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