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상. 일. 그의 이름을 듣고 한국의 신인감독인가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교포 3세, 이상일은 아오이 유우 주연의 영화 <훌라걸스>로 일본영화계의 신성으로 떠올랐던 감독입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6월 9일 개봉하는 <악인>은 제 34회 일본 아카데미에서 주, 조연, 음악상까지 총 다섯 개 부문을 휩쓸며 일본영화계에서 다시 한 번 이 한국 이름을 가진 감독의 지분을 공고히 만들었습니다.
요시다 슈이치의 동명소설을 영화로 만든 <악인>은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 한 남자와 기구하게도 그 순간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한 여자의 슬프고 숨 막히는 도주의 나날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관객들을 향해 “세상에서 하는 말이 맞는 거죠? 그 사람, 악인이었던 거죠?”라고 되묻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유상무상무상’을 떠올리게 하는 서글서글한 눈웃음과 친절한 태도 사이 매서운 감각을 묻어둔 남자, “알아듣는데, 말을 잘 못한다”는 겸손 속에 이상일 감독과의 대화는 한국어로 묻고 일본어로 대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10_LINE#>
100: 개봉에 앞서 봉준호 감독님과 <악인>을 함께 보고 ‘시네마톡’ 시간을 가졌다고 들었습니다. 만남은 즐거우셨는지요.
이상일: 바쁘실 텐데 함께 해주셔서 너무 감사했죠. 봉준호 감독님은 언제나 신작이 가장 기대되는 감독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가장 많은 자극을 받는 작품들을 만들어 오신 분이기 때문에 봉 감독님이 <악인>을 어떻게 보셨을까 정말 궁금했어요.
100: 그래서, 어떻게 보셨다고 하시던가요?
이상일: 그걸 제 입으로는.... 직접 물어봐주세요. (웃음) 영화를 보시기 전에는 그저 살인사건을 다룬 미스터리물 정도로 생각하셨다고 해요. 그러다 점점 한 사람, 한 사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부분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거기서 파생되는 본질적인 질문을 피하지 않고 정면승부하려는 영화였다고 말씀해주신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유이치의 금발머리는 <괴물>에 나오는 송강호 씨의 머리색을 참고했다”
100: <악인>을 보고 있으면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어찌나 힘에 부치지 않고 달려가는지, 체력적으로 대단한 영화라는 느낌이 듭니다.
이상일: 이 영화뿐만 아니라, 저는 그걸 ‘로케트 스타트’라고 부르는데, 마치 로케트처럼 쏘아 올려서 내려오지 않고 쭉 올라가는 리듬을 좋아하는 편이에요. 보통 영화 시작해서 10분이 승부라고 말하는데 그 처음 10분의 느낌을 어떻게 하면 마지막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항상 하거든요. <악인>의 경우는 거창한 스토리도 아니고 신이 바뀔 때마다 상당히 여러 인물들이 등장해요. 결국 매번 나오는 새로운 인물들에게 계속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시나리오 작업부터 싸워왔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셨을 것 같네요.
100: 마치 100미터 달리기를 2시간동안 쉬지 않고 하는 느낌이랄까요.
이상일: 윗분들에게서나 주변에서, 촬영도 편집도 페이스조절 혹은 페이스분배를 좀 더 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요. 그런데 제가 육체적으로 힘이 남아있는 한은 그런 조절은 좀 힘들 것 같아요. (웃음)
100: 원래 영화뿐 아니라, 모든 면에서 그렇게 로케트 같은 추진력과 체력을 보이시는 편인가요? (웃음)
이상일: (분명한 한국말로) 아뇨, 오직 영화만!
100: 사실 <악인>의 등장인물 중에 가장 의외였던 건 역시 유이치 역을 연기한 츠마부키 사토시가 아닐까 해요. 그의 미모가 사실 어촌에서 그렇게 숨어 지낸다고 해도 숨겨질 미모는 아닌데 말이죠. (웃음) 혹여 츠마부키 사토시의 출중한 외모가 관객들로 하여금 유이치라는 사람을 평가하고 그의 행동을 판단하는데 있어서 방해 요소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하는 고민은 없었나요.
이상일: 음.. 사토시군이 그럴 만큼 잘생기지는 않았어요. (웃음) 아니 사실 잘생기긴 했는데. 만약 딱 보기에도 악인의 얼굴을 가진 사람이 유이치를 연기했다면 정말 재미없었겠죠. 현실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있잖아요. 자세히 살펴보면 얼굴은 남자답고 잘생겼는데 뭔가 매력이 없고 눈에 띄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요. 만약 사토시가 잘생긴 얼굴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에 대한 자신도 없고, 그러다보니 매력도 드러내지 못하는 인물을 굉장히 사실적으로 연기했을 때 그때 달성할 수 있는 효과는 평범한 사람이 연기 했을 때 보다 훨씬 더 좋을 수 있다고 봤어요. 어쩌면 사토시의 캐스팅은 그런 부분에 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100: 영화를 보는 내내 내가 알던 꽃미남 사토시를 돌려달라고 울고 싶을 정도였지만 (웃음) 결과적으로 배우 츠마부키 사토시에게도 좋은 도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유이치와 접점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셨나요?
이상일: 접점을 찾았다기보다는 사토시 속에도 내가 모르는, 혹은 아무도 모르는 보이지 않는 얼굴이 분명히 있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사실 얼굴도 잘생겼고, 인기도 많고, 많은 영화에 출연한 성공한 친구잖아요, 하지만 한명의 배우로서는 본인이 앞으로 가야할 길에 대한 걱정도 고민도 정말 많았어요. 단지 귀엽다, 잘생겼다 이상의 강력한 개성이 필요한 시점이었죠. 예를 들어 아사노 타다노부나 오다기리 조 같은 개성을 가진 배우는 아니니까요. 본인 역시 그런 부족에 대해 자각을 이미 하고 있는 상태였어요. 그런 의미에서 <악인>을 통해 성취하고 달성해야하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던 셈이죠.
100: <악인>에서 츠마부키 사토시의 연기를 보면서 꽃미남에서 이제 할리우드의 굵직굵직한 대작을 장악하는 배우가 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성장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이상일: 일본 아카데미상에서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았을 때 어찌나 울던지. 뚝 그쳐! 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어요. (웃음) 끝나고는 그저 무대 뒤에서는 꼭 끌어안아 주긴 했지만요. 그런데 이 녀석이 개봉 첫 날 무대인사에서도 또 울더라고요. 원래 눈물이 많은 편은 아닌 것 같은데, 그만큼 자신을 끝까지 몰아붙여서, 그동안 안하던 방식의 연기를 해냈는데 이걸 과연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에 대한 공포나 두려움이 있었나 봐요. 그게 결국 인정받고 평가받은 데 대한 안심의 눈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어요.
100: 유이치의 노란 금발머리, 빨간 옷 등은 인상적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눈에 안 띄게 살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보이는데 말이죠.
이상일: 말을 통해 뭔가 소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대신 모든 이들이 그렇듯이 자신을 드러내고 싶다는 욕구가 없는 건 아니거든요. 그게 머리색이나 옷을 통해 드러나는 거죠. 그런데 그 선택 역시 눈길을 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본능이라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밝은색 옷과 어두운색 옷이 있다면 자신도 모르게 밝은 옷을 선택하는 경우처럼요. 유이치의 금발머리는 아마도 그의 잠재의식 속에 분명히 존재하는 그의 욕구를 설명해주는 것 이라고 생각해요. 그 지저분한 금발의 디테일은 사실 <괴물>에 나오는 송강호 씨의 머리색을 참고해달라고 머리하시는 분에게 설명했어요.(웃음)
“유이치의 얼굴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어요”
100: 후카츠 에리가 연기한 미쓰요는 가장 큰 변화를 가지게 되는 인물입니다. 사실 처음과 끝, 그녀의 얼굴 표정의 변화가 드라마틱하게 느껴지지 않지만 분명 이 여자가 변했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이상일: 소설은 큐슈의 북부지방을 전전하는 로드무비 형태를 띠고 있어요. 다른 장소들에 여러 사람들이 등장하는 군중극 같은 느낌도 있고요. 하지만 영화는 풍경이 주는 차이가 아니라 인물의 얼굴로 차이를 두자고 생각을 했어요. 즉 여러 장소에서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인물들을 보여줌으로서 상황을 전개해 가는 거죠. 미쓰요의 얼굴이나 표정에서 변화보다는 그 동안 보이지 않았던, 보여주지 않았던 표정이 하나씩 드러나는 느낌이길 바랐어요. 점점 내제된 욕구가 조금씩 충족이 되는 부분도 있고, 숨겨져 있던 욕구가 하나씩 하나씩 드러나는 느낌을 가져달라고 후카츠 에리와 이야기 했었던 것 같아요.
100: 집과 직장, 한 치를 벗어나지 않는 미쓰요의 삶을 보고 있으면 무슨 일이라도 제발 일어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오히려 비극일 수도, 운명일 수도 있는 이 ‘납치사건’이 그녀의 인생의 축제 같다는 느낌이 들만큼.
이상일: 간단하게 말하자면 유이치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살아있구나 느낀 여자죠. 그렇게 살아있다는 실감과 함께 나 역시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감동과 기쁨을 느끼는 상태. 결국 사랑받고 있다, 사랑하고 싶다는 욕구가 윤리적으로 필요한 선악의 구분이나 모럴을 뛰어넘는 거죠. 그 부분이 미쓰요라는 캐릭터가 가지는 매력이기도 하구요.
100: 감히 추측하건데 감독으로서 즐거움이란 자신이 생각지도 혹은 요구하지도 않던 어떤 지점을 배우가 보여주거나 그 이상을 해낼 때가 아닐까요.
이상일: 맞아요. 영화 찍으면서 가장 즐거운 순간은 말하신 바로 그 순간일거예요. 특히 후카츠 에리가 목 졸림을 당할 때의 표정은 정말 최고다! 라고 생각했고요. (웃음) 감독이란 늘 상상 이상의 연기를 배우가 보여줬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매일 촬영장에 가는 것 같아요. 기자님은 어떤 장면이 좋으셨어요?
100: 미쓰요가 양복점 남자손님들의 바지밑단을 접어주면서 보이던 그 미소요. 언제나 누군가에게 친절하게만 살아온 여자, 자신의 욕망이 존재하는지 조차도 모르는 것 같은 그 무던함이 답답하기도 하고 또 안쓰럽기도 했고요.
이상일: 그래요. 유니폼을 입으면 사람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기호가 되어버리는 것 같아요.
100: 무라카미 류의 소설 <69>를 영화화 한데 이어서 <악인> 역시 요시다 슈이치의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는데 원작소설이 있을 때 그것을 옮겨오는 것에 대한 원칙이나 본인만이 발견한 노하우가 있나요.
이상일: 아! 노하우라... 정말 있으면 좋은 텐데요. (웃음) 물론 조심하는 건 있어요. 그건 바로 스토리에 얽매이지 말자는 거예요. 기본적으로 시간상으로는 소설이 긴 경우가 많잖아요. 소설의 긴 시간 속에는 여러 스토리와 전개가 있는데 그걸 무리하게 두 시간 안에 압축해야한다고 생각하면 거기에는 분명 부작용이 생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가장 중요한 건 캐릭터예요. 주인공을 중심으로 주요인물들의 필요한 에피소드가 무엇인가를 결정하면서 취하거나 버리는 방법이죠. 일단 마음에 드는 소설을 영화화 하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원래 스토리를 전혀 다른 이야기로 바꾸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요. 대신 캐릭터와 캐릭터의 관계, 적대관계든 사랑하는 사이든 간에 소설 속에서는 비교적 길게 다루어졌던 그 관계를 영화에서는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편이예요. 처음 만났을 때 굉장히 싫어했던 두 사람이, 다른 신에서는 매우 좋은 관계가 될 때 그 신과 신 사이 어떤 일이 있었을까, 하는 것을 다이내믹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소설과 다른 영화의 매력인 것 같아요.
100: 결국 소설로 읽어도 될 이야기를 굳이 영화로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어떤 ‘영화적 순간’에 대한 차별점일 것 같은데 <악인>에서 이상일 감독이 생각하는 ‘영화적인 순간’은 어떤 장면일까요. 원작을 뛰어넘는 혹은 자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이상일: 유이치의 얼굴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 얼굴을 비추고 싶다는 욕구가 있었어요. 살인을 저지른 이 남자의 얼굴을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판단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이 영화의 첫 신도 마지막 신도 유이치의 얼굴로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죠. 첫 신에서 유이치의 얼굴을 본 관객들이 마지막에도 같은 얼굴로 느끼고 나올까 하는 게 영화의 승부수였어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는 좋은 사람이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요”
100: 작가 요시다 슈이치는 소설에서 등장인물의 이야기를 각자의 입장에서 서술하는 순간을 만들죠. 어쩌면 그 글을 읽는 순간의 판단은 독자에게 넘기는 식으로. 혹시 각본을 쓰면서 영화가 소설과 같은 방법을 택해야하는가 혹은 감독의 시선이나 입장 같은 것을 넣을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고민 역시 있었을 것 같아요.
이상일: 감정이입이라는 간단한 말로 설명하기 좀 힘든 부분이 있어요. 감정이입으로만 보자면 저도 딸이 있기 때문에 내 딸이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면 어떨까 하는, 아버지 요시오의 감정에 분명히 이입되는 부분이 있었던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변두리에서 성장해오면서 한 번도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살아보지도 못한 그렇게 밖에 살수 없었던 유이치의 모습이 결국엔 영화적으로 저를 끌어당기는 부분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소설 안에서 힌트는 있지만 답은 없었기 때문에 영화 안에서는 그 힌트를 중심으로 답을 계속 찾아갔죠. 시나리오에는 애매모호한 표현이나 물음표로 남겨놓기도 했거든요. 여기서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런 식으로요. (웃음)
100: 원작의 이것만큼은 꼭 살리고 싶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있었다면요.
이상일: 요시오가 비오는 날 사고지점에서 죽은 딸과 재회하는 장면이요. 사실 소설 <악인>은 엄청나게 리얼한 디테일로 꽉 짜여있는 작품이지만 그 장면이 유일하게 판타지거든요. 왜 그 신을 꼭 넣고 싶었냐고 물으신다면 직감입니다, 라고 이야기 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저 이 신은 꼭 찍고 싶다 대신 가장 아날로그적으로, 절대로 컴퓨터그래픽을 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죠.
100: 그러게요. 덕분인지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죽은 요시노가 사람처럼 느껴지는 장면이긴 했어요. (웃음) 오히려 살아있던 그녀보다 훨씬 더 측은하기도 했구요. 소설에서 주요 사건이 일어나는 후쿠오카와 사가를 연결하는 미쓰세 언덕이나 등대에 대한 묘사가 탁월한데요. 로케이션에 많은 공을 들였던 것 같습니다.
이상일: 다른 로케이션도 쉽지는 않았지만 그 중에서 등대를 찾는 것이 가장 힘들었어요. 전국은 아니지만 큐슈지방에 있는 등대란 등대는 다 가봤을 정도로 등대 마니아가 되었어요. (웃음) 해안가를 거의 다 돌았는데도 마음에 드는 데를 못 찾았어요. 결국 육지가 아니라면 섬인가, 라는 생각에 섬을 몇 군데 가봤죠. 최종적으로 찾은 곳이 지금 영화 속에 나오는 섬의 등대구요. 원작에서의 등대의 존재와 의미와는 좀 다른 곳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100: 어떻게 다른 느낌인가요?
이상일: 원작은 두 사람이 숨어있는 공간이 인가랑 크게 멀지않고 그저 경찰이나 사람들로 부터의 도피처 정도의 생각이 든다면, 영화에서는 아예 이 두 사람을 제외한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공간으로서 등대를 설정했어요. 나가사키 현에 있는 다섯 개의 섬으로 구성된 '오도열도'라는 곳이에요. 일본에서 가장 서쪽에 위치한 섬이죠. 결국 등대에서 두 사람이 보는 석양은 일본에서 가장 늦게 지는 해인 셈이죠.
100: 소설을 읽을 때 영화화라는 목적을 가지고 많이 보는 편이세요. 아니면 그냥 기본적으로 다독가인가요.
이상일: 예전에는 그냥 소설 읽는 것을 좋아했고, 최근에는 직업병이라고 해야 하나요? 아무래도 읽으면서 영화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100: 결국 이 작품을 쓰면서 또 연출하면서 인간의 근원은 선한가 악한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던졌을 것 같습니다. 그것이 죽은 요시노를, 혹은 죽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마스오를, 혹은 죽인 유이치를 보여주는 순서와 방법에서까지 영향을 끼쳤을 것 같구요.
이상일: 음... 이야기가 결국 상당히 철학적으로 흐를 수밖에 없는데요. 일단은 내가 그런 철학적 고민들을 계속 가지고 살아온 인간인가? 라고 물어보신다면 꼭 그렇지는 않는 것 같구요. 하지만 감히 말씀드린다면 그동안 살아온 환경 속 만남과 부딪힘 속에서 어렴풋이 그런 게 아닐까 깨달은 적은 많아요. 지금 질문을 받은 것도 내가 어떤 환경에 부딪히는 거잖아요. 그럴 때 생각하는 거죠. 3시간 전에 부대찌개를 먹을 때만 해도 이런 철학적 고민하게 될지는 생각을 못했던 거죠. (웃음) 근원적으로 선하나 악하냐보다는 우리에게 결핍되어 있는 부분은 그 악과 선에 대한 자각이라는 생각이에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는 좋은 사람이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요.
100: 유이치와 미쓰요, 결국 그들이 그 짧은 시간 나눈 건 뭐였을까요? 사랑일까요, 운명의 상대를 가장 불행한 순간, 가장 불행한 방법으로 만난 것뿐일까요?
이상일: 만약 이후에 이들에게 시간이 허락되었다면 이것이 사랑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던 만남이었겠죠. 그보다는 욕구를 발견하게 도와준 대상이었던 것 같아요. 사랑을 하고 싶다 혹은 살고 싶다는 걸 깨닫게 하고 그것을 체험하게 해준 상대가 아닐까 하는. 그 욕구를 아름다운 것이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더러운 것이라고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뭔가를 숨기면 스트레스가 더 클 것 같아서 한국 이름을 쓰고 있어요”
100: 세상에 어떤 사건이 생기면 미디어는 빨리 피해자와 가해자를 만들고 어떤 단어로 이들의 상황을 판단하고 재단하는 속성이 있는 것 같아요. 유이치에게 일어난 일도 만약 보도만 보는 입장이라면 다르게 받아들였겠죠. 영화에서 유이치의 할머니가 미디어에 괴롭힘을 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최근 한국에서 발생했던 한 아나운서의 자살을 떠올렸습니다.
이상일: 예, 그 뉴스는 저도 조금 듣긴 했습니다. 아마도 인터넷이 훨씬 발달되어 있는 한국이라면 그런 광경이 훨씬 더 심했으리라는 생각이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미디어만이 악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카메라와 펜을 든 그들 역시 집에 가면 평범한 가장이고 자식이 있는 엄마고 아빠이잖아요. 가끔 미디어만을 절대 악처럼 말하는 우리는 과연 당당할 수 있을까, 라는 반성은 늘 하게 되요.
100: 조총련계 고등학교를 나와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다 영화가 하고 싶어 일면식도 없던 재일교포 이봉우 씨의 영화사 시네콰논을 무작정 찾아가셨다구요.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요.
이상일: 어린 시절부터 영화광은 아니었어요. 보는 건 좋아했지만 내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구요. 막연히 영화 관련 일을 하고 싶다는 상상은 했었는데 경제학과를 나왔으니 경제와 관련된 프로듀서를 해야하나? (웃음) 라고 생각했던 시기는 있었죠.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일본영화학교에 들어갔는데 3년 수료 후 졸업 작품에서 모두 감독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한 반에 20명 정도의 학생이 있으면 감독은 그 중 한 명 만이 할 수 있었어요. 3년 동안 비싼 돈 내고 학교를 다녔는데 영화 한 편 정도는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 시나리오를 써서 연출을 했던 <청>이라는 영화가 해외 영화제에서 상도 받고 하면서 결국 지금까지 감독으로 살게 된 거죠.
100: 그냥 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는 건 고도의 자랑일까요? (웃음) 본인이 감독이라는 직업에 적합할 수밖에 없는 장점, 이라면 뭘까요?
이상일: 성격이 꼬여있다는 거? (웃음) 그리고 고집이 세요.
100: 스태프들로부터는 악인이라는 소리를 꽤나 듣는 편이시겠군요.
이상일: 아뇨, 그렇게 안 불리우기 위해서 스태프들을 열심히 떠받들고 있습니다. (웃음)
100: 어떻게 보면 일본사회에서는 여전히 이질적일 수밖에 없을 한국 이름을 고수하고 계시잖아요. 이유가 있나요?
이상일: 편안하게 일본 이름으로 개명하는 경우들도 많은데, 일단 그건 뭔가를 숨기는 거잖아요. 한국 이름으로 사는 것 보다 뭔가를 숨기면서 살기 때문에 오는 스트레스가 훨씬 더 클 것 같아서 이대로 쓰고 있어요.
100: 한국배우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으시죠?
이상일: 네, 송강호 씨를 정말 좋아해요. 90년대 말 <조용한 가족>의 일본프로모션 때문에 김지운 감독과 송강호 씨가 일본에 오신 적이 있어요. 당시 저는 학생이었는데 그래도 한국말을 좀 한다는 이유로 두 분을 수행하는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송강호 씨와 밤새 술도 먹고 가족사진도 보여주시고 그려셨는데... (웃음) 김지운 감독이 요코하마 구경 가고 싶다고 하셔서 다음날 아버지에게 차를 빌려서 요코하마까지 운전해서 갔던 기억도 있구요. 송강호 씨가 이후에 한 번 더 프로모션 차 일본에 오신 일이 있었는데 인사를 드렸더니 잘 지냈나며 반갑게 기억해주셔서 너무 영광이었어요. 그때로부터 10년이란 세월이 흘러서 여전히 저를 기억 하실지는 모르겠어요.
100: 출국하시기 전에 한번 뵙자고 하시지 그래요?
이상일: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죽기 전에 송강호 씨와 꼭 영화 한 편 찍고 싶습니다! (웃음)
<10 아시아>와 사전협의 없이 본 기사의 무단 인용이나 도용,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 민, 형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0 아시아 글,사진. 백은하 기자 one@
10 아시아 편집. 이지혜 seven@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