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지난달 17일 목동아이스링크. 1년여 만이었다. 태극마크를 되찾았다. 입성은 당당했다. 총 68점으로 종합우승을 거뒀다. 생애 두 번째 국가대표 정상. 하지만 곽윤기(연세대)는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냥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이유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배가 고팠다. 체중감량 병행 탓에 의식이 흐렸다. 쏟아진 찬사도 감퇴를 촉진했다. 온갖 격려, 질문, 응원 등은 한데 어우러져 뇌리를 혼미하게 했다. 의식을 회복한 건 두 시간쯤 뒤 찾은 인근 식당. 노릇노릇 익은 고기 몇 접을 씹어 넘기자 이내 뿌듯함이 밀려왔다. 그 맛은 달콤했다. 혀끝에 닿는 육즙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말한다. “맛있지만 색달라서 더 맛있었다”고. 인상 깊은 소감의 근원은 무엇일까. 해답은 곽윤기의 대답 속에 숨어있다.
이하 곽윤기와 인터뷰
스포츠투데이(이하 스투) “다시 태극마크를 달게 됐다. 그것도 종합순위 1위로.”
곽윤기(이하 곽) “나 자신에게 뿌듯했다. 속으로 ‘해냈어’라고 몇 번을 되뇌었다. 국가대표 선발전은 여타 대회와 다르다. 트랙 느낌부터 그렇다. 모든 우승이 달콤하지만 초콜릿 맛 일색이라면 선발전은 새로운 달콤함을 제공한다. 아이스크림 맛이라고나 할까. 맛있지만 색달라서 더 맛있는 거다.”
스투 “이번이 처음은 아니더라. 2008-2009년 선발 때도 종합순위 1위였다. 당시 점수는 91점으로 더 높기도 했다.”
곽 “당시는 지금과 다르다. 처음 해냈다는 생각이 무척 강했으니까. 지금 그런 느낌은 없다. 대신 새로운 기분이 든다. 무엇인지 말로 표현하긴 다소 애매하다.”
스투 “지난해 ‘짬짜미 파문’으로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따로 훈련을 소화해야 했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곽 “오히려 편했다. 태릉선수촌에 가면 늘 목표가 생긴다. 심리적 압박을 받으며 운동을 해야 한다. 지난 1년간 그런 부담은 느낄 수 없었다. 자유롭게 훈련에 전념할 수 있었다.”
스투 “대한빙상경기연맹의 징계로 의욕이 많이 저하됐을 것 같은데.”
곽 “초반 목표가 흐려져 고생을 많이 했다. 스케이트 끈을 매면서도 ‘이걸 왜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과 송재근 코치의 도움이 없었다면 다시 트랙에 설 수 없었을 것이다.”
스투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받았나.”
곽 “부모님은 묵묵히 지켜봐줬다. 끝까지 아들을 믿어줬다. 송 코치는 당근으로 흐트러진 날 다잡아줬다. 후배들 앞에서 자주 내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연습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지도자의 역할이 그런 것 같다. 제자가 스스로 훈련을 할 수 있게끔 유도하는 것. 그런 차원에서 나는 좋은 스승을 만났다.”
스투 “후배들에게 그만큼 많은 걸 가르쳐줬을 것 같은데.”
곽 “오히려 배운 게 더 많다. 솔직히 놀랐다. 대표 팀에서 보지 못했던 기술을 여러 선수들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이다. 후배들의 성장 속도가 매섭다.”
스투 “국가대표 선발전 우승은 예상했나.”
곽 “(고개를 가로저으며) 전혀. 경기 전 상상했던 건 절망과 좌절에 빠진 모습이었다.”
스투 “비관적인 모습을 그린 이유가 궁금하다.”
곽 “연습량이 부족했다. 대회 두 달여를 앞두고 훈련소에 입소했다. 군사훈련 소화로 4주간 스케이트를 탈 수 없었다. 대회를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은 한 달 남짓이었다. 목표는 크게 잡을 수 없었다. 그저 대표 팀에 뽑혔으면 하는 바람만 간절했다.”
스투 “악조건을 딛고 1위에 오른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곽 “운이 따랐다. 초반 1500m 예선에서 탈락 위기를 맞았다. 출발부터 난조를 보이자 잘해야 결승 진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경기를 치를수록 컨디션이 회복됐다. 신기했다. 이유는 모르겠다.”
스투 “한 달 동안 체계적인 훈련을 소화한 까닭 아닐까.”
곽 “정신없이 준비하긴 했다. 체력 증진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시간이 부족했으니까. 대신 실전 감각과 스피드를 올리는데 주력했다. 컨디션 유지에도 신경을 많이 쓰고. 하지만 효과를 많이 본 것 같진 않다. 그저 운이 좋았다.”
스투 “심리적인 영향도 있었을 것 같은데.”
곽 “여느 대회와 달리 부담이 없긴 했다. 애초 기대치가 낮았으니까. 그래서 편하게 트랙을 달린 것 같다. (잠시 말을 멈춘 뒤) 원래 긍정적인 편이다. 경기를 망쳐도 다음에 잘하면 된다고 여긴다. 지금 생각해보니 스스로 압박하지 않은 것이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스투 “한 달 훈련동안 가장 힘들었던 점을 꼽는다면.”
곽 “다이어트다. 훈련소에서 4주간 생활하며 5kg이 붙었다. 밥을 먹어도 금방 허기져 평소보다 많은 양을 섭취했다. 문제는 퇴소 뒤였다. 그간 맛보지 못한 음식들을 앞에 두고도 참아야 했다.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치킨이 가장 심했다.”
스투 “무리한 다이어트 병행으로 문제가 생겼을 법도 한데.”
곽 “연습 도중 자주 현기증이 났다. 너무 어지러워 픽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혼미해도 이겨내야 했다. 체중이 무거우면 코너에서 원심력에 문제가 생기니까. 다리에 느껴지는 감각도 달라진다. 스피드 증진을 위해 감량은 피할 수 없는 관문이었다.”
스투 “노력한 만큼 스피드는 올랐나.”
곽 “훈련소 입소 전 수준은 회복했다. 랩타임을 8초 10대로까지 내렸다. 만족할만한 기록은 아니었다. 체중 조절만 잘했다면 더 내릴 수 있었다. 3.5kg을 감량했는데, 1.5kg을 더 뺐어야 했다.”
스투 “경기 뒤 ‘할 말이 없다’고 말한 뒤 서둘러 경기장을 빠져나갔는데.”
곽 “정말 할 말이 없었다. 1등을 할 거라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정신까지 혼미했다. 어떻게 경기장을 나왔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
스투 “우승 뒤 뉴스 등을 통해 지난해 ‘짬짜미 파문’이 다시 거론됐다.”
곽 “이제는 많이 무뎌졌다. 하도 오래돼서(웃음). 그냥 이야기가 나오면 씁쓸하다.”
스투 “국가대표 선발전 내내 이정수와 거의 말을 하지 않던데.”
곽 “시간이 더 필요하다. 대표팀에서 다시 만나겠지만, 솔직히 어떻게 대해야 할 지 아직 잘 모르겠다.”
* 2편에서 계속
스포츠투데이 이종길 기자 leem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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