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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당당한 인생2막]“미친듯 사랑한 커피 역전의 삶 밑천됐죠”

시계아이콘읽는 시간3분 7초

커피의 달인 | 김용덕 테라로사 대표

[50+ 당당한 인생2막]“미친듯 사랑한 커피 역전의 삶 밑천됐죠” [사진:이코노믹리뷰 송원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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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원에서 월 1억5000 매출 공장형 카페 일궈

지금 당신이 보는 것은 커피를 볶는 한 남자다. 그윽한 커피 향기와 어우러진 모습에서 중후한 지성미가 물씬 풍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남자, 우아한 분위기와는 달리 한 마디로 미쳤다.


“커피는 제가 미치도록 좋아하는 여자와 같아요. 온 마음을 다해 다가가는데 품 안에 들어올 것 같으면서도 이내 도망가고 말죠. 지인이 예전의 제 모습을 이렇게 설명하더군요. 커피를 마시면 주변 사람들에게 미친 듯이 커피 얘기만 하더랍니다. 한 3년만 미쳐 보세요. 그 3년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보장해 줄 거예요. 대신 제대로 미쳐야 합니다.”

커피전문가 김용덕(53)씨에게 커피는 소통의 수단이고 생존의 무기다. 은행원에서 커피 달인으로 변신, 제2의 삶을 성공적으로 꾸려갈 수 있었던 원천은 미쳤기에 가능했다. 처음엔 그저 박식하고 경험 많은 줄만 알았는데 어느새 경외감마저 느끼게 하는 ‘장인’의 면모가 비친다. 인터뷰 내내 아무리 껍질을 벗겨도 그 자리엔 두툼한 열정 하나가 있었다.


한때 20억 빚쟁이 밑바닥 인생


그의 성공 뒤에 숨은 눈물과 고통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 때 20억 원의 빚 때문에 밑바닥까지 추락했었다.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다시 일어서서 월 매출 1억5000만 원의 어엿한 커피전문 회사를 키워냈다. 지난 22일 오뚝이 같은 인생반전(人生反轉)의 주인공을 만났다.


차를 타고 3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곳. 인적도 차량도 드문 한적한 시골길에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흰색의 멋스러운 집이 보였다. 강릉의 커피공장이라 불리는 ‘테라로사(Terarosa)’다. 11년 전, 김 대표가 세운 공장형 카페다. 테라로사에는 대형 로스팅 기계들과 원두를 담은 자루들이 보관된 로스팅실, 커피나무가 자라는 온실, 빵을 직접 구워내는 베이커리가 두루 갖춰져 있다. 이곳을 커피공장이라 일컫는 이유다.


“커피 먼저 마시면서 하시죠.” 누가 카페 주인 아니랄까봐 김 대표는 인터뷰 직전 커피부터 대접했다. “와, 진짜 맛있는데요…. 사실 새벽 4시까지 대표님을 공부했어요”라고 하자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건넨다. 기자가 마신 커피는 ‘르완다 마헴브’란 원두를 핸드 드립으로 내린 커피란다. 갓 볶은 커피의 풍미가 부드러운 산미와 어우러져 혀끝에 감돌았다.


[50+ 당당한 인생2막]“미친듯 사랑한 커피 역전의 삶 밑천됐죠”


평일 낮 시간임에도 빈 좌석이 없을 만큼 손님들로 북적였다. 강릉의 손꼽히는 커피 명소로 자리 잡은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전국에서 많은 손님들이 찾아와요. 맛과 질 좋은 커피 때문이죠.” 한국에서 생(生) 커피원두를 직접 수입해 볶는 몇 안 되는 곳이란 ‘차별성’이 크게 작용했다.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그때 로스팅한 원두를 갈아서 커피로 만들기 때문에 그만큼 신선하며 맛 또한 훌륭하다.


메뉴는 20여 가지를 족히 넘는다. 이 중 최고 인기 메뉴는 ‘커피 테이스팅 코스’. 1인당 8000원이란 가격에 바리스타가 추천하는 3가지 종류의 커피를 한 번에 맛볼 수 있어서다.


최상급 원두 최고의 로스팅 ‘경쟁력’


테라로사의 원두 품질이 커피업계 최강인지 물었다. “최상급 원두는 우리 회사의 자부심”이란 대답이 돌아왔다. 실제로 커피의 주산지인 아프리카는 물론 커피산업이 발달한 브라질 등 각국에서 테라로사의 커피를 맛보고 고급 커피의 발전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찾아올 정도다.


커피 맛의 첫 번째 경쟁력은 최고의 원두를 선택하는 데 있다고 김 대표는 강조했다. 이 때문에 그는 세계의 커피 산지 곳곳을 발로 뛰어다니며 좋은 원료를 찾는 데 집중한다. 평균 한 달에 한 번 꼴로 해외에 나간다. 몇 년 전부터는 더욱 업그레이드된 원두를 구입하겠다는 일념으로 매우 높은 등급의 ‘스페셜티’ 커피를 들여오고 있다.


스페셜티 커피는 산지의 특수한 기후로 인해 특이한 향미를 나타내는 고급 커피로, 전체 커피시장에서 10% 미만을 차지한다. 커피 마니아들을 단박에 사로잡을 만큼 개성 있고 매력적인 맛이 특징. 그의 부지런한 발품 덕분에 테라로사는 ‘강릉의 성지’란 별명까지 얻었다.


다음으로 어떻게 볶느냐가 두 번째 경쟁력. 단 몇 초만 지나도 탄 맛이 나고 커피를 망치게 되는, 매우 까다로운 공정이다. “로스팅에 정답은 없어요. 오로지 경험만이 비법입니다. 수많은 경험을 쌓고 감으로, 몸으로 체득해야 해요.” 그가 매일매일 로스팅 일지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도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한 것이다.


“가끔 성공 노하우를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럼 제가 할 수 있는 대답은 한 가지입니다. ‘내 혀를 가져가세요!’라고. 맛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현재 자신의 혀를 믿지 마세요. 감각은 무던한 노력으로 키워내야 합니다.”


‘달인’ 김용덕에겐 거칠고 딱딱해 보이는 손이 있다. 커피를 만드는 사람의 숙명이라고나 할까. 뜨거운 주전자를 들고 사는 바리스타에게는 굳은살이 오히려 영광의 상징이다. 그는 척박한 국내 커피업계에서 원조이자 최고가 되고 싶었다.


8년의 커피공부 끝 빛이 보였다


그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무조건 생계를 위해 상고에 진학했고 정해진 방향처럼 은행에 입사했다. 당시 돈을 벌기에는 은행만큼 좋은 직장이 없었다. 연봉 1억5000만 원에 안정적인 회사. 이런 곳을 정년퇴직이 아닌, 중도에 그만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21년을 일하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졌어요. 때마침 외환 위기와 맞물린 것도 계기가 됐죠. 내 인생 마흔. 한번쯤은 인생을 되돌아볼 나이였습니다.”


터닝포인트가 절실히 필요했다. 주저할 것도 없이 단 10분 만에 사표를 내고 나왔다. 아내에게도 퇴직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아내는 묻지 않고 묵묵히 그가 하는 대로 믿고 따라와 줬다. 처음 1년 동안은 미술을 배우고 배낭여행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두려움은 없었을까. “성실하고 열심히 사는데 절대 실패할 리 없다고 생각했어요. 자신감이 충만했죠.”


1999년 강원도 속초에 레스토랑을 차렸다. 월 순수익 1000만 원. 장사는 잘 됐다. 그런데 또 회의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뼈 빠지게 일하면서 내 삶은 이게 뭔가 싶었다. 커피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레스토랑에서 후식으로 제공되던 커피를 조금씩 공부하기 시작하면서다. 알면 알수록 흥미로웠고 깊게 빠져들었다. 결국 멀쩡하게 잘 되던 레스토랑 사업을 접고 2002년 다시 고향인 강릉으로 돌아와 연 게 테라로사다. 원두커피 시장이 태동하던 때라 커피 관련 자료가 턱없이 부족했다. 정보를 닥치는 대로 수집했고 번역서와 원서를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보고 또 봤다.


책에 나와 있는 유명 커피숍 주소를 들고 무작정 전국으로, 해외로 찾아 나섰고 몇 번씩이나 가봤다. 8년간 그의 커피 공부는 계속됐다. “커피를 알게 되면서 열정이 생겼고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됐어요. 커피 때문에 소믈리에 과정을 배우고 역사를 공부하고 여행을 했죠. 또 건축·예술에 미식사까지 탐독했답니다.”


배움의 영역은 자꾸 넓어지는데 사업은 갈수록 저물어갔다. 2년 동안 빚은 20억 원대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지옥 같은 생활의 연속이었다. 그때 절친한 친구가 금전적으로 도움을 줬고 그걸로 악착같이 버티면서 위기를 겨우 벗어났다. 6년쯤 지나서 시내에 직영점을 하나 냈고 고급 호텔, 레스토랑, 커피숍 등에도 원두를 공급하며 사업은 성장해 나갔다. 그의 말마따나 이제는 먹고 살 만한 여유가 되는, 탄탄한 기반을 구축했다. 커피만 팔진 않는다. 커피 기계와 인테리어 등도 컨설팅과 함께 제공한다. 영업을 위해 주 1회 서울 출장을 간다.


커피 교육 아카데미도 운영하고 있다. 매년 전 직원을 커피 원산지와 커피숍, 유명 음식점을 둘러보게 하는 해외연수 시스템은 김 대표가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이다. “최고를 알아야 진짜 최고가 될 수 있어요. 연수를 통해 자신이 부족한 걸 알고 노력하는 자세를 갖게 되죠. 직원들의 비전을 위해 투자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의 커피 열정은 전염력이 강하다. 바이올린을 전공한 그의 딸이 바리스타의 길로 들어섰다. 취재 차 만났던 한 방송국 PD는 세계 유명 커피 대회인 ‘컵 오브 엑설런스’에 한국인 첫 국제 심판관으로 참여하는 등 경력 4년 만에 유능한 커피 전문가가 됐다.


그의 옆에는 좋아하는 커피가 있고 커피를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 테라로사를 찾은 손님에게 커피나무를 기념품으로 선물하는 소소한 즐거움, 좋은 원두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까지 합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는 그. 앞으로 서울과 프랑스 파리에 지점을 내고 싶다는 바람을 내비쳤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이 말을 남겼다. “커피를 만난 건 제 인생에서 행운입니다.”


이코노믹 리뷰 전희진 기자 hsm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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