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 광양제철소 전남수씨, 봉사활동 인연 맺은 소녀가장
광양제철소로 옮긴 후 연락 끊긴 25년만에 전화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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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채명석 기자] “여보세요? 오빠, 저 OO예요.”
포스코 광양제철소 품질기술부에서 근무하는 전남수씨는 최근 사무실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늘 마음속에 기억하고 있던 여동생 최OO씨와의 25년만의 통화였다.
지난 1984년 포스코 포항제철소에 입사한 전씨는 첫 월급을 받자마자 늘 생각해왔던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전남 순천이 고향인 그는 어릴적부터 음식을 만들면 이웃과 나눠먹었던 어머님의 가르침을 받아 자연스레 봉사에 눈을 떴고, 직장인이 되면 본격적으로 이를 실천하겠다고 다짐했었다.
친구들 7명, 그리고 여자친구와 함께 봉사모임을 만든 뒤 포항시청으로부터 처음 소개받은 이가 바로 최씨 3남매였다. 전씨 등은 당시 열두 살 소녀가장이었던 최씨의 집을 찾아 청소도 하고 밑반찬을 만들어줬으며 십시일반 모은 돈으로 생활비도 보태줬다. 장학생으로 공부한 적이 있던 이들은 틈틈이 과외학습도 해주면서 3남매의 공부도 지원했다.
마음을 여니 자연스레 최씨 3남매도 이들을 오빠, 언니, 형, 누나로 믿고 따랐다. 전씨 등은 3남매가 좋은 유년시절의 추억을 만들어주기 위해 경주로 여행을 가고 송도 바닷가로 하이킹도 함께 했다. 여행을 떠날 때는 항상 사진관에서 카메라를 빌려 즐거운 시간을 담은 사진도 촬영해 선물로 주곤했다.
3남매가 걱정 없이 공부만 할 수 있도록 전셋집까지 얻어주기도 하고, 학습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했다. 최씨가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에는 인근 회사에 취직할 수 있도록 도와줘 그가 자립해 동생들을 돌볼 수 있도록 했다. 최 씨는 비록 고교 진학의 꿈은 포기했으나 자신의 힘으로 가정을 일으킬 수 있었고, 전 씨와 친구들은 그에게 “언제든지 여유가 되면 다시 학업의 길로 들어서라. 필요하면 우리가 얼마든지 멘토가 돼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삼남매와의 추억은 수년 후 전씨가 광양제철소로 직장을 옮기면서 더 이어지지 못했다. 지금도 소년소녀가장 돕기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는 그는 틈틈이 최씨 3남매가 생각이 났지만 연락처를 몰라 마음속으로만 궁금해했다.
여전히 포항에 살고 있었던 최씨가 수소문해 전씨의 연락처를 알아내 전화를 했단다. 전씨와 최씨, 두 사람 모두 반가움은 실로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열두살 어린이였던 최씨는 이제 서른일곱살의 여인이 됐다. “제 소중한 소녀 시절을 따뜻하게 지켜준 오빠와 친구분들에게 감사한다”는 말에 전 씨의 마음은 뭉클해졌단다.
사회공헌 전문가가 되겠다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전씨는 제철소에서 근무하는 동안 광양 소재 대학과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해 학위를 받았다. 특히 그가 시도한 언어 재활 프로그램은 학교 동문이 운영하는 사회복지 법인에서도 적용됐는데, 매우 인상적이고 인기 있는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아 큰 도움이 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소년소녀가장, 장애인들과 웃음을 공유하며 표현하고 싶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25년 만에 걸려온 최씨 삼남매 전화에 힘을 얻었다. 앞으로 보다 체계적이며 수준 높은 봉사활동을 다양한 곳에서 점진적으로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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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석 기자 oric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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