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생존 DNA 지속 가능 경쟁력 확보...매출 증가, 이미제 제고, 투자 확대 선순환
[아시아경제 이정일 기자] #1 지난 4월 미국 멕시코만에서 발생한 원유 유출 사고는 글로벌 석유화학 회사인 영국 BP에게 악몽 그 자체였다. 현장에서 11명이 사망하고 490만 배럴의 원유가 유출된 사상 최악의 이번 사고로 BP는 '환경 파괴범'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동안 기부나 사회봉사 등의 사회공헌 활동으로 쌓아온 기업 이미지도 한 순간에 무너졌다.
#2. '고용을 위해 빵을 판다'는 빈곤층의 일자리 창출에 주력하는 루비콘 베이커리의 철학이다. 1973년 주립정신병원의 폐쇄를 막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지역 주민들이 설립한 이 회사는 장애우와 빈곤층, 노숙자들에게 직업 훈련을 시켜 일자리를 제공하고, 이들이 만든 빵을 팔아 수익을 올렸다. 1986년 당시 12명의 직원이 일하던 회사는 2009년 직원 250명, 연 수익 1600만 달러 기업으로 성장했다.
#3. 2010년 세계 소셜벤처 경연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리모션 디자인은 개발도상국 장애인들에게 저렴하고 튼튼한 의족을 공급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설립자 조엘 새들러는 400~1만 달러가 넘는 인공무릎관절 대신 플라스틱와 볼트 등으로 조립해 만든 20달러짜리 인공 무릎 관절을 개발해 지금까지 인도 장애인 1300여 명에게 보행의 자유를 안겨줬다.
영국 BP의 위기와 루비콘 베이커리의 성장, 그리고 리모션 디자인의 희망. 얼핏 무관해보이는 낱말들이지만 결국은 '착한 기업'이라는 키워드로 관통한다. 영국 BP는 환경 파괴범으로 몰리면서 위기에 처했고, 베이커리는 상생으로 명성을 쌓았으며, 리모션 디자인은 희망의 메시지로 지구촌을 훈훈하게 달궜다.
'착한 기업'이 2011년 글로벌 경제에 새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과거 자선이나 기부, 사회 공헌 등 사회적 기업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져온 착한 활동들이 이제는 친환경, 투명 경영, 상생 등으로 개념을 확대하면서 '착한 기업' 신드롬을 낳고 있는 것이다.
마케팅의 거장 필립 코틀러 박사(노스웨스턴대 켈로그경영대학원 석좌교수)는 진화하는 사회적 기업 활동을 CSA(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로 규정하면서 "앞으로 사회 책임 경영을 올바로 수행하지 않는 기업은 성장은 물론 생존조차 어렵게 될 것"이라고 일갈했다.
1981년 사회적 기업가 양성기관인 아쇼카재단을 세우고 '사회적 기업가(social entrepreneurs)'란 개념을 처음 정립한 빌 드레이턴 회장은 "일반 기업가는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하지만 사회적 기업가는 사회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그것을 보다 더 광범위하게 적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필립 코틀러 박사가 말한 CSR이나 빌 드레이턴 회장이 언급한 사회적 기업은 회사의 이윤보다는 사회적 가치를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착한 기업, 따뜻한 비즈니스'로 귀결된다.
◆ 착한 기업은 선택이 아닌 필수
촌각을 다투는 글로벌 비즈니스 생존 게임에서 착한 기업은 선택이 아닌 필수로 자리잡았다. 올 3월 미국 경제전문지 포춘(Fortune)이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 순위를 보면 '착한 기업 = 경쟁력'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포춘의 9가지 선정 기준 가운데 경영혁신, 인재관리, 사회적 책임, 재무건전성, 제품 및 서비스 품질 등이 착한 기업 DNA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2년 연속 1위에 오른 애플에 이어 버크셔해서웨이(2위), 구글(4위), 존슨앤 존슨(5위), 마이크로소프트(10위) 등은 '노블리스 오블리제' 철학에 충실하면서 사회적 책임에 주력하는 기업들임을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다.
1류 기업들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 것인지, 착한 기업이어서 1류 기업으로 성장한 것인지 따지는 것은 '닭이냐 달걀이냐' 논쟁만큼이나 무의미하다. 착한 DNA는 그 자체가 기업의 지속 가능한 경쟁력이기 때문이다.
필립 코틀러 박사는 "인터넷의 발달로 기업간 기술적 격차가 줄어들고 정보 독과점 현상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는 소비자들을 감동시키는 착한 코드가 강력한 경쟁력"이라고 설명했다.
2009년 전국경제인연합회 조사 결과, 전체 응답자의 78%가 "가격이 비싸더라도 착한기업의 상품을 구매하겠다"고 응답했다. 이는 2년 전 응답자가 8%에 불과했던 것과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로, 착한 DNA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본질과 결코 상충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하비 골럽 전 AIG 회장은 이를 "좋은 일을 하면 사업도 잘 된다"는 한 마디로 명쾌하게 정리했다.
◆ 선순환으로 착한 기업 경쟁력 확대
착한 기업은 기업의 경쟁력이라는 측면에서 선순환을 이룬다. 박성배 삼성연구소 수석 연구원은 "소비자들이 착한 기업을 선호하면서 매출이 늘고, 브랜드 이미지가 제고되고, 좋은 인재들이 몰리고, 주주들의 투자가 확대되면서 다시 착한 기업은 착한 활동에 주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특히 올해는 ISO 26000과 SRI 펀드 등 비즈니스 환경이 변하면서 기업들은 착한 DNA 확보를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만든다. 기업을 포함한 모든 조직과 기관의 사회적 책임을 규정하는 ISO 26000은 조직 거버넌스, 인권, 노동, 환경, 공정운영, 소비자, 지역사회 참여와 발전이라는 7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사실상 착한 기업의 모두 조건이 여기에 들어 있는 것이다.
물론 ISO 26000은 '해야 한다(shall)'로 강제하는 다른 ISO 표준과는 달리 '하는 게 바람직하다(should)'만 제시한다. 권태식 한국생산성본부 부회장은 "ISO26000은 어디까지나 권고사항이지만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에게도 더는 미룰 수 없는 필수적인 문제"라면서 "ISO26000 제정을 계기로 사회책임경영은 이제 새로운 무역장벽으로 대두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기업에 투자함으로써 수익을 얻는 사회책임투자(SRI) 펀드는 그 규모가 무려 20조 달러에 이른다. 그동안 SRI에 냉소적이었던 국내 기업들도 2009년부터 본격화된 한국거래소의 SRI 지수발표, DJSI 코리아 발표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기업의 CSR 보고서 경쟁도 한층 치열해질 전망이다. 기업의 사회적 활동이 국제 표준으로 제정됨으로써 새로운 무역장벽으로 작용하고 기업 투자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부각되는 만큼 CSR 보고서가 중요한 기업 활동의 근거로 활용될 것이 명확해졌다.
돌이켜보면 착한 기업은 1980년대 갓 출발한 사회적 기업이 진화한 21세기의 생존 DNA다. 일본 강점기, 동족상잔의 비극 등 근ㆍ현대사를 관통하는 격변기 속에서 불굴의 의지로 경제 대국의 기틀을 마련한 우리나라는 선진국 진입을 앞두고 다시 한번 도약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놓여 있다.
경제대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한 바로 이 시점에 우리나라가 성장의 동력으로 '착한 기업, 따뜻한 비즈니스'에 주목해야 할 이유다.
이정일 기자 jay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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