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100년-미래경영 3.0 창업주DNA서 찾는다 <12>대한전선 설경동 회장①
1970년 1억5000만원 투자 인송문화재단 설립 대이어 유지 실천
$pos="C";$title="";$txt="▲ 인송문화재단 설립자인 설경동 회장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수여하고 있다.";$size="450,280,0";$no="2010052414090705096_1.jpg";@include $libDir . "/image_check.php";?>[아시아경제 이윤재 기자] 사업보국의 정신으로 대한전선을 창립한 창업주 인송(仁松) 설경동 회장은 경영 뿐만 아니라 모든일에서 나라에 대한 생각을 잊지 않았다. 인송은 조국의 인재 육성에 있어서도 아낌없이 투자하며 참다운 경영인의 모습을 보였다.
다른 기업들이 인수를 꺼리던 성냥 공장을 인수할 때도 인송은 해방 직후 생필품 부족으로 곤란에 빠진 국민들을 걱정해 성냥 사업을 선택했다. 1955년 조선전선을 인수해 대한전선을 창립할 당시에도 많은 걱정과 망설임이 있었지만 끝내 '사업보국'의 정신으로 투자를 결정했다.
인송의 이 같은 품성은 교육에 대한 투자에서도 가감 없이 나타났다. 인송은 "우리나라가 부흥하려면 교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며 교육 사업과 인재 육성에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1923년 설립했던 동명의숙(東明義塾)이 1936년 청진시 포항동에 자리를 옮기는 데 필요한 비용을 모은다는 발표를 하자 가장 먼저 달려가 5000원의 자금을 쾌척했다. 또 함경북도 청진에 수산고등학교를 세울 당시에도 발기인으로 직접 나서며 2만원을 학교에 희사했다.
인송의 어머니는 인송이 세살되던 해에 남편을 잃고 가족의 모든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때문에 인송은 보통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곧장 중학교 진학을 할 수 없었다. 보통학교 시절부터 선생님 집에서 하숙을 하며 학교를 다니던 처지에 중학교 진학은 그에게 언감생심이었다.
졸업후 3년 뒤에야 혈혈단신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어렵사리 건넌 일본 땅에서도 학업을 잇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인송은 학자금을 벌기위해 밤늦게까지 떡을 팔고, 새벽 일찍부터 신문을 돌리며 향학열을 불태웠다. 5년만에 어렵사리 중학교 교육을 마무리 지은 그는 도쿄의 대창상고(大倉商高)로 진학했다. 그러나 진학한 이후에 더 이상 자신을 위해 고생하는 어머니를 두고 공부만 할 수 없다는 판단에 학교를 중퇴하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어렵사리 공부를 했기 때문에 그에게 학업에 대한 꿈과 열정은 더욱 컸다. 더욱이 힘들게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학업의 마침표를 찍지 못했기 때문에 교육투자는 더 적극적이었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날 즈음에도 인재 육성의 꿈을 이어갔다.
인송은 1970년에 사재를 출연해 '인송문화재단'을 설립했고, 1972년 건강문제로 인해 설원량 2대회장에게 경영을 물려준 후에도 인재 양성을 위해 문화재단 이사장 자리를 유지했다. 그 간의 그가 겪었던 고난과 역경을 후대에는 더 이상 전하지 않으리라는 뜻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인송문화재단은 '인재 양성과 과학기술 발전 등 육영사업을 통해 민족문화의 향상과 국민 복리의 증진에 기여'를 목적으로 당시 1억5000만원의 거액을 투자해 설립한 재단이다. 재단 설립이후 4년여만에 그가 임종한 뒤에는 그의 아내 유인순 여사가 재단의 이사장으로 중ㆍ고등학생은 물론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했다.
현재는 고(故) 설원량 회장의 아내인 양귀애 여사가 2004년부터 재단 이사장을 맡아 인송 설경동 회장의 인재육성의 뜻을 잇고 있다. 양 이사장은 이사장을 맡은 이후 130억원을 출연해 총 출연금을 145억원으로 늘리는 등 '인간존중의 경영'을 펼친 창업주를 넘어서 인재 육성의지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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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재 기자 gal-r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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