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나간 짓' 주위 만류에도 과감한 결단
철저한 준비.자신감 초일류 삼성 만들어
탁월한 선견지명 '제일제당' 등 사업적중
[아시아경제 김정민 기자] 고 호암 이병철 삼성 회장은 기업을 키워 이익을 내고 이를 새로운 사업에 투자해 산업을 성장시키는 것이야 말로 기업가의 사명이라는 신념을 평생동안 간직했다. 특히 '무한책임'을 지는 최고 경영자(CEO)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국내외 경제동향과 시대의 흐름을 읽고 미래에 대비하는 '도전과 창조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호암은 오랜 경험과 노력으로 생겨난 '직관'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이에 의존하기 보다는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한 합리적인 판단이야말로 CEO가 갖춰야할 기본적 소양이라고 믿었다. 반면 철저한 사전준비를 거쳐 확신이 선다면 남들보다 한발 앞서 '모험적 도전'에 뛰어들 수 있는 과단성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그는 언제나 남이 하지 않는 일, 남이 말리는 일에 도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호암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정보화시대에 반도체 사업의 발전없이는 우리 경제의 미래를 자신하기 어렵다는 소신아래 주변의 만류를 무릅쓴 채 그룹의 명운을 걸고 반도체 사업에 진출, 세계 초일류기업 삼성의 기틀을 닦았다.
젊은 시절 이미 거부의 반열에 들어섰음에도 평생을 받쳐 끊임없이 새로운 사업을 찾아 도전에 나섰던 그의 '기업가 정신'은 오늘날 전세계를 무대로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기업인들에게 꺼지지 않는 등대가 되고 있다.
$pos="C";$title="";$txt="1976년 구축된 삼성그룹 종합전산시스템을 시찰하는 호암 이병철 회장";$size="550,383,0";$no="2010011508142499020_1.jpg";@include $libDir . "/image_check.php";?>
◆삼성을 일군 호암의 도전정신 =이 회장은 그의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어느 사업이건 실패의 위험은 뒤따른다. 그러나 가장 위험한 것은 실패의 여지가 있다는 불안을 안고 착수하는 것이다. 100%의 자 신이 없으면 애초에 착수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속에 불안을 품은 채 착수하면 주저해 전력투구를 못하게 된다. 배수진을 치고 백척간두에서 단호히 결행해도 예상치 못 한 장애에 부딪히거늘 하물며 출발부터 의심하고 망설이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라고 했다.
이 회장은 일생동안 이같은 신념을 지켜낸 '기업가 정신'의 화신이다.
제일제당, 제일모직과 같이 삼성그룹의 모태가 된 기업을 설립할 때나, 전자산업 진출을 모색할 때도 회사 임직원들은 물론 정부와 해외 제휴기업마저 이를 반대하고 나 서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또한 제조업에 투신한 이래 이어져온 '대량생산을 통한 국제 경쟁력 확보'라는 이 회장의 창업정신은 당시 경제환경 속에서 '정신나간 미친 짓'으로 공격당하거나 경쟁사 와 정치권의 모함에 발목을 잡히기 일쑤였다.
그러나 6.25 휴전협정이 체결되기도 전에 설립작업을 시작했던 제일제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적 생산설비를 갖춤으로써 대량생산을 통해 가격을 수입품의 3분의 1까 지 낮춰 시장을 평정했고 제일모직 또한 마카오 복지가 휩쓸던 국내시장에 최초의 국산 모직물을 선보이며 시장을 석권함으로써 이 회장의 판단이 옳았음을 입증했다.
이 회장의 꺼지지 않는 기업가 정신은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졌다. 타계하기 3개월 전 마지막으로 참석했던 공식행사인 3라인 착공이 대표적이다.
당시 삼성전자 임직원들은 3억4000만달러라는 막대한 투자비가 들어가는 3라인 투자를 강행할 경우 가뜩이나 1,2라인 건설로 적자였던 회사의 재무상황이 크게 악화될 것을 우려해 "건설하고 있다"는 거짓말로 병원에서 투병 중이던 이 회장의 눈을 가리려 했다. 그러나 이 회장은 "착공식에 참석하겠다"며 1987년 8월 7일 착공에 들어갈 것을 엄명했다.
이처럼 임직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행한 3라인 건설은 이후 이어진 반도체 호황 속에서 삼성의 '반도체 신화'를 이끌어냄으로써 이 회장이 남긴 마지막 선물이 됐다.
정치ㆍ경제적 격변기속에서도 이 회장이 손대는 사업마다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사전조사와 사업계획을 마련,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을 때에 비로소 사 업에 뛰어드는 '유비무환'의 조심성이 뒷받침 됐다.
이 회장은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전준비와 계획이다. 계획을 잘못 세워 중도에 자금난으로 허덕이거나 판로가 막혀 당황하게 된다면 경영자로서 자격이 부족하다. 자기 능력의 한계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이를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며 철저한 사전준비의 중요성을 임직원들에게 깊이 각인시켰으며 이같은 전통은 지금도 삼성에 연연히 이어지고 있다.
$pos="C";$title="";$txt="1973년 호암 이병철 회장이 제일합섬 구미공장 건설현장에서 직접 지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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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읽고 내일에 투자하라 ="사업을 하는 사람은 사업 계획을 할 때 항상 현재의 레이아웃에 만족하지 말고 앞으로 무엇을 더 해야 할 것이지, 지금 하는 것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항상 생각해야 한 다"(1983.7.9 반도체회의에서)
TV, LCD, D램 반도체 등 손대는 사업마다 세계 1위를 질주하며 전 세계인의 뇌리 속에 '삼성(SAMSUNG)' 브랜드를 깊이 아로새긴 삼성전자가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하기까지는 초석을 닦은 이 회장의 과감한 결단이 중요한 밑거름이 됐다.
이 회장을 경영일선에서 잠시나마 물러나게 했던 '한비사건'은 오늘날 삼성이 있게 한 전환점이다. 필생의 사업으로 추진했던 비료공장 건설이 쓰라린 좌절을 맞보면서 무산되자 이 회장은 일본 재계의 거물들과 경제전문가 등과 교류하며 새로운 사업 구상에 나섰다.
그는 우리나라의 공업화 과정과 산업화 동향을 면밀히 분석한 결과, 신규업종은 중화학공업이나 기술집약적인 분야에서 찾아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1968년 2월 경영 일선에 복귀한 이 회장의 지시로 구성된 삼성물산 개발부는 전자산업을 유망업종으로 제시, 비로소 삼성전자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이 과정에서 이 회장의 내일을 내다보는 앞선 시각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 회장이 전자산업 진출을 결심하고 수원시 외곽 매탄벌 45만평, 경남 울주군 삼남 면 가천에서 75만평의 부지를 매입하자 시중에서는 삼성이 부동산 투기에 뛰어들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앞서 사업에 진출한 전자회사들의 공장 규모가 수만평 수준이었던 데 비해 10배 가까운 부지를 사들이면서 오해를 산 것이다.
이같은 소문을 접한 이 회장은 간부사원들에게 "전자사업은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기술상의 이점, 규모의 이점으로 세계시장을 파고 들어야 성공한다. 지금은 이 땅이 커보이지만 머지않아 더 많은 땅이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의 선견지명대로 수원단지는 그 뒤 4~5년간 이어진 시설확장과 계열사 및 사업장의 설립으로 부지가 모자랄 지경이 됐다.
그리고 14년 뒤인 1983년 2월 7일 저녁. 도쿄의 오쿠라 호텔에서 체류 중이던 이 회장은 오랜 고심 끝에 홍진기 중앙일보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 공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렇게 이뤄진 이 회장의 '2.8 동경선언'은 불투명한 시장전망, 선진국과의 극심한 기술격차, 막대한 투자재원 조달, 고급 기술인력 확보 등 수많은 난관을 무릅쓴 과감한 결단이자 삼성의 운명을 가른 일대 사건이었다.
자원이 부족한 나라가 세계시장에서 경쟁하기 위해서는 고부가가치 하이테크 산업에 진출해야 한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이 회장의 '2.8동경선언'으로 잉태된 삼성의 반도체 신화는 아들인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이어받아 싹을 틔움으로써 오늘날 메모리반도체 세계 1위라는 결실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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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민 기자 jmki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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