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민 시인의 진도의 선홍빛들- 유배와 낙조<3>
유배를 자처하다
현대를 살아가는 문인이나 예술가들, 혹은 그런 기질의 소유자들은 저 먼 시대의 유배를 부러워하고 동경한다. 유배와 유사한 형태의 고립과 격리를 스스로 자처하고 자행한다. 도시에서의 일상은 도무지 예술의 토대인 전적인 고독이나 몰두를 쉽게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하고 애쓴다해서 모두가 예술을 위한 자기유배의 시간이나 장소를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극소수만이 절대가난의 궁핍을 각오하면서 자신을 인적 드문 시골의 어디론가 몰아넣거나 혹은 용케 획득한 경제적인 여유속에서 도시를 벗어난 자신만의 유배지격인 집필공간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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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치 허련이 낙향해 지은 운림산방은 그런 점에서 여러모로 돋보인다. 허련은 조선 후기 남종화를 대표하는 화가다. 사실 남종화, 북종화는 우리나라가 아닌 중국의 가름법이다. 당나라의 왕유를 중심으로 하는 수묵산수화파인 남종화, 이사훈을 주축으로 하는 채색산수화파인 북종화 양대 화풍으로의 갈림이 우리나라에 그대로 전해진 것이다. 문인화는 통상 남종화로 분류된다. 남종화의 대가인 허련이 고향인 진도의 의신면 사천리로 돌아와 말년을 보낼 화실인 운림산방을 지은 것은 50세 전후다. 흔히들 추사 김정희의 죽음이 그로 하여금 낙향을 결심케 했으리라고 추측한다.
눈 밝은 대가는 대개 단숨에 묻혀져있는 재능을 알아본다
괜한 추측이 아닐 만큼 허련의 삶은 추사와 깊고도 긴 인연 속에 있었다. 한 사람이 더 등장하는 그 인연은 재능 있는 사람은 아무리 구석진 곳에 있어도 결국은 눈에 띄기 마련이며 눈 밝은 대가는 대개 단숨에 묻혀져있는 재능을 알아본다는 최고의 좋은 예이다. 그 예의 시작은 어려서부터 서화에 뛰어났던 스물여덟살의 진도 청년 허련이 우리에게는 차를 전파시킨 승려로 더 많이 알려진 당대의 대선사였던 초의 선사를 해남 대둔사로 찾아가면서부터 시작됐다.
허련은 그곳의 암자에 머물면서 초의가 가진 소장품과 안목을 통해 그림에 대한 또 다른 식견을 키워갔다. 그러던 어느 날 초의 선사는 더없이 가까운 사이였던 추사 김정희에게 허련의 그림을 가져다 보여주었다. 추사는 단박에 허련의 재능을 알아보고는 초의 선사를 통해 한양으로 올라올 것을 권했다. 그것이 바로 추사와 소치라는 두 뛰어난 사제지간의 평생의 인연의 시작이었다.
추사의 제자가 된 허련은 머잖아 임금에게도 불려가는 당대 최고의 화가로 대접받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 당했을 때 세 번이나 그를 보러 제주도를 찾았다. 진정으로 서로를 존경하고 존중한 필생의 사제지간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pos="C";$title="";$txt="현대인의 일상이 오히려 유배와 유폐의 삶과 닮았다라고 밝히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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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찰산 밑 운림산방에서 우선 가장 크게 눈길을 사로잡는 곳은 입구쪽의 연못이다. 연못은 어디에 있든 대개 풍경에 여유와 변화를 주고 바라보는 데 즐거움을 준다. 그런데다 운림지는 배용준, 전도연 주연의 영화 ‘스캔들’을 찍었을만큼 아름답다. 그러니 감탄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풍수지리학자인 조용헌의 글을 보면 그 감탄이 단순히 풍경에서 비롯된 감탄만은 아니다. 운림지는 풍수학적으로 명당인 것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연못이 없었다. 이 연못은 소치가 첨찰산을 타고 흐르는 시냇물을 끌어모아 조성한 연못이다. 이 터는 이 연못이 있어야 명당으로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운림지가 있기에 운림산방 자리는 풍수적으로 명당의 조건을 갖추게 된 것이다.
풍수가에서 회자되는 말 가운데 ‘고산(高山)은 장풍(藏風:바람을 막는 곳)이요 평지(平地)는 득수(得水:물을 얻는 곳)’라고 해서 평지의 터는 물이 있는가 없는가를 무엇보다 중요하게 본다. 물론 인공으로 조성된 운림지는 오직 풍수적인 이유만이 아니라 정신수양과 조경적인 관점에서도 필요한 연못이었다.
그러니 그런 명당의 연못 덕분에 운림산방이 허련부터 시작해서, 미산 허형, 남농 허건, 허림, 허문 등, 5대가 화업을 이어가는 세계적으로도 드물 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리란다.
그러니 이렇게 와서 잠시 연못주위를 걷는 것만으로도 예술적인 발복의 기운을 얻을 수 있지 않겠는가. 천천히 걸어본다. 크지도 아주 작지도 않은 연못이다. 인공적인 느낌보다 자연스러운 편안함이 더 큰 연못이다.
자연을 언제고 그냥 누릴 수 있는 인생이란 얼마나 장엄한지에 감동해야 한다
연못을 지나면 소치의 화실이었던 본채가 나온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지붕을 볼 수 없는 고층아파트와 빌딩에서 생활하는 지금보다 지붕이 보이는 이런 낮은 집에 살던 시대가 훨씬 인간이 잘나고 축복받던 시대가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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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런 화실집 마당과 낮은 돌담 밑으로 라벤더 꽃이 많이 보인다. 라벤더꽃, 내가 참 좋아하는 꽃이다. 보라색이라 색감도 특별하게 돋보인다. 그런데도 서양꽃과 운림산방의 조화를 어색하게 생각하는 바로 이게 오히려 편협한 고정관념일까. 진도에서 돌아와보니 서울에서도 라벤더꽃이 뜻밖에 쉽게 눈에 띈다. 프랑스의 플로방스를 소개하는 작은 사진집에서나 봤던 이국적인 꽃. 그런들 서울이나 진도가 플로방스인 건 아니라고 나는 좋아하는 꽃앞에서 괜스레 퉁명을 떨기도 한다.
혼자라면 연못이 보이는 마루에 앉아 하루 종일이라도 있을 듯하다. 관광객들이 없지 않은데도 고즈녁함에 큰 방해가 되지 않는 건 연못과 집과 마당과 마루의 배치가 알맞게 서로를 보여주면서 또한 가려주어서일까. 맑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햇빛과 반짝이는 나뭇잎들이 나비처럼 몸을 팔랑이고 싶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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