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기 까지 수 많은 것을 본다. 하얀 천장에서부터 사랑하는 이의 까만 눈망울까지 단 1초도 쉬지 않고 '눈'을 통해 '마음'을 소통한다.
침대에서 일어나 '칫솔'이라는 것을 들고 양치질을 하고 '밥'이라는 것을 먹고 배를 채우며 '펜'과 '종이' 혹은 '자판'으로 소통을 위한 언어를 찍어내려 간다. 연인에게 '사랑'이라는 단어를 속삭이고 설레여 한다.
그런데 가만. 과연 이것들은 무엇인가?
연애 편지를 쓰다가 편지지 수십장을 찢어버렸던 적이 있다.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 할지, 무슨 말로 어떻게 온전한 마음을 전달해 낼 수 있을지 고민이 지나치다보니 수백, 수천개의 단어들이 머리 속에서 둥둥 떠다녔다.
왜 나는 만지고 느낄 수도 없는 사물에 생명을 불어 넣으려 하는가, 'A'라는 단어에 대한 나의 느낌을 상대방도 100% 공감할 수 있을까. 그러다보니 '나(I)' 조차 의심스러워졌다.
이 그림에는 수수께끼가 있다.
누가봐도 담배 파이프로 보이는 정교한 그림을 그려놓고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라고 적어놓았다.
이렇게 황당한 경우가 또 어딨을까. 파이프가 아니면 이 그림은 무엇이라는 것인가.
마그리트는 '이것'이라는 지칭어는 '파이프'가 아니므로 밑의 문장은 틀린 게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렇다. 왜 우리는 '이것'이 위의 파이프 그림을 가르킨다고 단순하게 생각했을까?
참고로 이 작품의 원래 제목은 '이미지의 배반'이다.
그림 속 말은 문, 시계는 바람, 달걀은 아카시아, 구두는 달, 모자는 눈이라고 각각 명기돼 있다.
파이프 그림을 보고나니 이제는 이 그림도 '확실히 잘못됐다'고 말하기가 조금 어려워졌다. 혼란스럽다.
마그리트는 이같은 그림의 종류를 수없이 그려냈다. 그가 가졌던 의문은 과연 '말이 사물을 보여줄 수 있을까'다. 그는 작업노트에서 "사물은 이름을 갖고 있지만 우리가 그보다 더 적합한 이름을 찾을 수 없는 건 아니다"고 말했다. 그저 우연히 마주칠 뿐 절대 말이 사물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는 것.
이젠 이성적이라고 믿는 우리의 '지성'도, '맛있는 사과'도 모두 'au revoir(굿바이)'
말과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불안감을 우리는 잘 느끼지 못한다. 평생을 의심 한 번 해보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마치 그림과 모순되는 글귀가 함께 자리잡은 액자 속 그림처럼 말이다. 경계도, 특별한 지정도 없이 부유하고 있는 위치 불명의 파이프(위)와의 간명한 대립.
'광기의 역사'로 유명한 프랑스의 현대철학자 미셸 푸코는 마그리트의 그림 속 '언어유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만일 그러한 배치가 나타날 때처럼 사라지게 된다면, 다시 말해 우리가 가능성을 순간적으로 감지하는데 불과한 - 그것의 형식이나 그것이 약속하는 것에 대해 인식하지 못한 채 - 어떤 사건이 18세기 말에, 고전주의 시대의 사고의 근거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 배치를 무너뜨리게 된다면, 그 때 우리는 마치 해변의 모래사장에 그려진 얼굴이 파도에 씻기듯이 인간이 이내 사라지게 되리라고 장담할 수 있다." <말과 사물.1966>
이제 우리는 이와같은 놀이에 참여할 것인가 혹은 혼란에 휩싸일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자, 이제 당신은 마그리트가 반복해 왔던 상식의 부정에 동참할 것인가?
유리창 '밖' 풍경과 유리파편 '속' 풍경 중 어떤 것이 우리가 바라보는 풍경인가? 우리는 어떻게 '진실'을 구분해 낼 것인가.
이 그림은 우리가 아무 의심없이 '그러려니'했던 의식을 벗어날을 때 겪게될 혼란스러움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저 예매한 세계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진정한 모습일지도 모른다.
과연 저 숲은 그림 '안'에 있는 걸까 아님 '밖'에 있는 걸까.
이같은 물음은 의식(안)과 객관적 세계(밖)를 우리가 구분해낼 수 있을까 라는 질문으로도 바꿀 수 있다.
마그리트는 이같은 종류의 그림을 수없이 그려냈다. 그가 진정 알고 싶어했던 것은 우리가 '본질'이라고 부르고 '존재'라 부르짓는 것들이 과연 '착각'에서 빚어진 감각적 오류가 아닐까.
솔직히 우리는 내 눈으로 푸른 하늘을 보는 것인지, 푸른 하늘이 내 눈에 보여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정답도 없다. 오히려 이는 어쩌면 인간이 신체와 정신을 분명히 분리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말도 안되는 '이분법적 사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하룻밤 쯤은 나의 코기토(cogito)에 대해 처절하게 고민해봐야 수동적 삶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교묘한 믿음 아래 무엇이 참인지 거짓인지 모르게 만드는 모호한 관계들이 끔찍하게 와닿을 때가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내게 '숨'을 불어넣고 나는 그 무의미한 것들에 집착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달리의 그림처럼 기억의 집요함에 지쳐 흐물흐물거리면서...
이현정 기자 hjlee303@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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