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믿음기자
한 사람은 한국전쟁 속에서, 다른 한 사람은 내전과 망명 속에서 고향을 떠났다.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한 이성자와 에텔 아드난은 서로 다른 시간과 배경을 살았지만, 추상이라는 언어로 우주를 사유했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두 여성 작가의 작업을 나란히 놓은 2인전 '태양을 만나다'는 이러한 교차 지점을 따라 두 개의 세계를 비교하며 읽어보게 하는 전시다.
수잔 메이 화이트 큐브 글로벌 아트 디렉터가 20일 서울 강남구 화이트큐브에서 열린 에텔 아드난·이성자 작가 2인전 '태양을 만나다' 기자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서믿음 기자
이성자는 1918년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프랑스로 건너갔다. 전쟁으로 삶의 기반이 무너진 상황에서 선택한 이주는 생존이자 새로운 출발이었다. 그는 파리에서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에 입학해 서구 모더니즘 미술을 본격적으로 접했고, 당시 파리 화단에서 활동하던 작가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예술 세계를 확장해 나갔다. 남성 중심의 추상 미술계 속에서 이성자는 회화에 동양적 사유와 우주적 질서를 결합한 독자적인 조형 언어를 구축하며 국제 무대에서 활동했다.
에텔 아드난은 1925년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태어났다. 그리스계 어머니와 시리아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여러 언어와 문화가 공존하는 환경에서 성장했다.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으며, 시와 소설, 저널리즘을 넘나드는 활동을 펼쳤다. 1977년 레바논 내전을 다룬 소설 '시트 마리 로즈'를 발표해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지만, 이 작품으로 인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면서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글과 그림을 오가며, 정치와 폭력, 자연과 우주를 사유하는 작업을 지속했다.
이성자 'Le Temps Sans Obstacle'. 서믿음 기자
두 작가의 삶은 '떠남'이라는 공통의 경험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 떠남은 단순한 물리적 이동이 아니라, 정체성과 세계관을 새롭게 구축하는 계기가 됐다. 이주 이후 두 작가에게 우주는 고향을 대신하는 사유의 공간이자, 경계를 넘어서는 상상의 장소로 자리 잡았다.
이성자의 추상은 구조적이고 응축돼 있다. 캔버스 위에 배치된 선과 사각형, 원형의 도형들은 인체와 지형을 암시하면서도 화면 전체를 하나의 질서로 묶어낸다. 반복적인 붓질로 쌓아 올린 색면은 직조에 가까운 밀도를 형성하며, 화면은 긴장과 균형 속에서 유지된다. 그의 회화는 감정의 즉각적 표출보다는 사유와 구성에 무게를 둔 우주적 질서를 보여준다.
반면 아드난의 회화는 색과 빛에서 출발한다. 단순한 기하 형태 위에 놓인 강렬한 색면은 태양과 에너지, 자연의 원초적인 힘을 떠올리게 한다. 2018년작 '무제'에서는 붉은 사각형에서 시작된 색이 점차 다양한 색으로 확장되며, 빅뱅 이후 우주가 팽창해 나가는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특히 태피스트리 작업에서는 태양과 달을 연상시키는 원형과 비정형의 색 조각들이 배치돼, 회화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확장된 공간감을 만들어낸다.
에텔 아드난의 'Farandole'. 서믿음 기자
두 작가의 작품은 제작 시기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이성자의 작업은 주로 1960년대 작품인 반면, 아드난의 작품은 2010년대 이후에 제작됐다. 그러나 이 시간의 간극은 오히려 두 작가를 연결하는 지점이 된다. 인간이 우주로 진출하며 지구를 하나의 행성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1960년대의 상상력은 이성자의 질서 있는 화면에 스며들었고, 과학과 우주론이 확장된 이후의 시각은 아드난의 색면 회화와 태피스트리로 이어졌다.
'태양을 만나다'는 이주와 망명, 여성 작가라는 삶의 조건 속에서 형성된 두 개의 추상 세계를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추상이 단순한 형식 실험을 넘어 시대와 존재를 사유하는 하나의 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전시는 서울 화이트 큐브에서 3월7일까지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