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준기자
김녹원 딥엑스 대표가 아시아경제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윤동주 기자
온디바이스 인공지능(AI)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 기업 '딥엑스(DEEPX)'가 현대자동차그룹과 손잡고 로봇용 AI 반도체 상용화의 신호탄을 쐈다. 양 사는 최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전자·IT 전시회 'CES 2026'에서 3년간의 밀착 협력 끝에 탄생한 '온디바이스 AI 칩'을 공개하며 올해부터 실생활에 투입될 로봇에 이를 본격 탑재하겠다고 밝혔다. 양 사가 개발한 칩은 5W 이하의 초저전력으로 구동되면서도 클라우드 연결 없이 로봇 스스로 인지·판단을 가능케 했다.
아시아경제는 최근 김녹원 딥엑스 최고경영자(CEO)를 만나 현대자동차와 삼성전자 등 국내외 대기업과의 협력과 한국 시스템 반도체 산업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들어봤다.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IT 전시회 CES 2026에서 딥엑스와 현대차로보틱스랩이 개발한 로봇 솔루션이 전시돼 있다. 백종민 테크 스페셜리스트
김 CEO는 애플에서 '아이폰X' A11 바이오닉 애리케이션프로세서(AP) 등 설계를 주도했던 반도체 설계자 출신이다. 이후 브로드컴·시스코·IBM 등 각 분야를 대표하는 글로벌 빅테크(대형 정보기술 기업)를 거쳐 2018년 온디바이스 AI 반도체 팹리스 '딥엑스'를 창업했다.
굴지의 글로벌 빅테크를 거친 그에게 한국 반도체 생태계의 한계를 묻자 "한국 사람들은 경험을 간과한다"고 지적했다. 김 CEO는 "인터넷·AP 칩·스마트폰 등 실리콘밸리 3대 양산체계를 모두 경험하며 성공한 사람들만 갖고 있는 '비하인드 스킬'을 지켜봤다"며 "모든 부분을 신경 써야 리더가 될 수 있는데, 한국에선 이런 노하우를 간과하는 측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시스템 반도체를 '종합 예술'에 비유했다. 설계·제조·소프트웨어·양산·사업화에 이르기까지 전 영역이 유기적으로 맞물려야 성과를 낼 수 있는 분야라는 뜻이다. 시스템 반도체는 메모리처럼 오랜 기간 축적된 표준과 성공 공식이 자리 잡은 산업이 아니다. 비교적 최근 경쟁이 치열해진 만큼 '경험의 부재'가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는 게 김 CEO의 진단이다.
김 CEO는 "아직 박지성이나 손흥민이 나오지 않았다"며 이 분야에서 유망 기업들이 목표로 삼을 성공 사례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도 짚었다. 그는 "축구에 빗대면 지금까진 K리그에서 싸우다가 월드컵 우승을 목표로 삼으려니 어려운 것"이라며 "국내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는 아직 글로벌 선두와 접해 있지 않고 모든 부분에서 시행착오가 많은 상태"라고 설명했다.
딥엑스는 지난해 여름 AI 반도체 'DX-M1' 양산에 돌입했다. M1은 'M.2 M-Key' 인터페이스를 사용하는 시스템온칩(SoC) 형태의 AI 가속기로, 뛰어난 성능과 범용성이 강점이다. 삼성전자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에서 5㎚(1㎚=10억분의 1m) 공정을 활용해 생산한다. 차세대 M2는 삼성 파운드리 2㎚ 공정에서 만들어질 예정이며 지난해 초 프로토타입을 완성했다.
애플 재직 시절 '파운드리 1위' 대만 TSMC의 생산체계를 경험해보고도 삼성 파운드리에서 칩을 생산하는 건 "엔지니어로서 국내 반도체 산업 전체가 함께 성장하길 바라기 때문"이다. M1 칩은 딥엑스의 최적화 설계로 수율 90%를 달성했다. 초기 양산 수율이 90%를 넘기는 건 이례적이다. 새로운 2㎚ 공정에 대해서도 "수율 이슈를 해결할 최적화 대안이 있다"고 자신했다.
딥엑스는 같은 팹리스인 퓨리오사AI·리벨리온 등이 제조하는 데이터서버용 추론 반도체보다 에지컴퓨팅용 신경망처리장치(NPU) 시장에 집중한다. AI 연산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시스템 반도체를 만드는 것이다. NPU 기반 컴퓨팅 시스템은 그래픽처리장치(GPU)보다 저전력·고효율로 성능을 낸다. 특히 저전력·고성능을 동시에 추구하는 '엣지 AI' 환경에 최적화돼 있다는 점에서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엣지 AI는 클라우드로 데이터를 보내지 않고 기기 등에서 곧바로 연산을 수행하는 것으로, 차량이 운전자 졸음 여부를 감지하는 기술 등이 있다.
김녹원 딥엑스 대표가 아시아경제와 인터뷰 도중 다보스 포럼 '마인즈2025' 트로피를 보여주고 있다. 마인즈 상은 세계경제포럼(WEF)이 100개 이상의 글로벌 기업 사례를 평가해 AI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술에 주는 상으로 딥엑스가 국내 최초로 수상했다. 윤동주 기자
최근에는 현대차로보틱스랩과 배송로봇 '달이 딜리버리(DAL-e Delivery)' 상용화에 나서는 등 로봇에서 성과를 내고 있다. 로봇 역시 저전력·고성능이 동시에 요구되는 분야다. 지하 등 어디서든 작동이 가능해야 하는 만큼 온디바이스·에지 영역에 최적화된 딥엑스의 칩이 주목받고 있다. 2023년부터 협력해온 양 사는 올해에도 새로운 로봇을 양산할 예정이다.
딥엑스는 엣지 AI 칩 기반의 '로봇 비전 AI 솔루션'을 실증한 성과로 지난해 말 세계경제포럼(WEF)이 주관한 마인즈(MINDS·Meaningful, Intelligent, Novel, Deployable Solutions) 프로그램에서 수상했다. 세계경제포럼이 100개 이상의 글로벌 기업 사례를 평가한 뒤 AI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술에 주는 '마인즈 2025' 상을 국내 최초로 수상한 것이다.
김 CEO는 트로피를 들어 보이며 "딥엑스 기술의 실효성과 사회적 기여 가능성을 세계가 인정한 것"이라며 "앞으로도 현장에서 작동하는 AI를 통해 실질적 가치를 제공하겠다"고 했다.
그는 딥엑스의 목표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에 도전한 축구선수 박지성과 손흥민을 제시했다. 국내 시장이 아닌 월가 상장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그는 "국내 기업들이 저평가받는 시장을 뚫고 들어가서 성공한 선례를 만들고 싶다"고 강조했다.
8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6 공식 스튜디오 이벤트 CES Foundry에서 김녹원 딥엑스 최고경영자(CEO)와 현대차로보틱스랩, 바이두 등 관계자가 '피지컬 AI 가속화'를 주제로 토론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딥엑스
김 CEO는 "한국 기업들의 좋은 칩이 세계에서 경쟁할 수 있어야 한다"며 반도체 산업의 미래를 위한 최우선 과제로 '수출 진흥'을 꼽았다. 그는 "중국·대만 기업들은 반도체 수출에 대한 세제 혜택이나 인센티브 정책이 막강하다"며 "중국만큼 거대한 재정적 지원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수출을 진흥할 수 있는 정책이 나와줘야 기업들의 경쟁력이 오를 것"이라고 했다.
김 CEO는 지난해 12월 열린 'AI 시대 K반도체 비전과 육성 전략' 토론회에서 이재명 대통령을 만나서도 "AI 반도체 수출의 교두보가 돼 달라"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김 CEO는 "AI 칩, AI 기술 등 최첨단 기술은 수출을 해야 살아남는다"며 "많은 정책이 국내 수요에 집중돼 있는데, 미국·중국·일본·대만 등으로 수출할 수 있는 정책을 마련해달라"라고 정부에 요청했다.
단순히 매출 확대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시스템 반도체는 개발 이후 글로벌 고객사의 실사용 검증 및 레퍼런스 확보가 가장 중요하다. 김 CEO는 "국내 시장은 한계가 뚜렷한 만큼 초기부터 해외 시장에 진입할 수 있도록 정책·금융·외교 채널이 함께 뒷받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술 경쟁력을 살리려면 국가 차원의 시장 개척 지원이 병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김녹원 딥엑스 대표가 아시아경제와 인터뷰 도중 현대차 도심형 스마트 관제 시스템을 소개하고 있다. 윤동주 기자
AI·반도체 산업은 속도가 핵심이지만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는 조직 문화와 리더십도 연구개발(R&D) 못지않게 중요하다. 김 CEO는 '좋은 기술 리더십'에 대해 "모든 사람이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조직, 모두의 성공을 위한 '베스트 아이디어'가 강한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래서일까, 딥엑스의 연구소엔 임원이 없다. 삼성전자 등 대기업 임원이나 R&D 센터장 출신도 이곳에선 평직원이다. 직함 대신 이름 뒤에 '님'을 붙여 부르고 상호 존댓말이 원칙이다.
그는 조직 운영 철학으로 ①노 콜옵션(No Call-Option) ②진실 기반 의사결정 ③실력 지향주의 ④명확한 비전 등 4가지를 제시했다. 예컨대 ①대표의 결정이 이해가 안 되면 누구든 질문할 수 있고, 직급이나 권한으로 결론을 밀어붙일 수 없다. ②모든 의사결정은 논리·증거·합의에 기반하며 ③나이·경력 등이 아닌 실력으로 승부한다. ④대표는 회사 차원의 비전을 제시하되, 모든 구성원이 각자의 커리어에서도 가치 있는 비전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끈다.
이런 철학은 ▲직접책임자(DRI) 지정 ▲전원 합의 등 제도화를 통해 조직에 적용되고 있다. 김 CEO는 "모든 태스크에 담당 리더를 둔다"며 "이때 리더는 의사결정자가 아니라 조직의 아이디어를 최적화해 반영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그 예로 '버터 데모' 사례를 소개하며 "구성원 의견을 종합한 뒤 관련자 모두가 동의할 만한 결정으로 추진한다"고 덧붙였다. 딥엑스는 M1 칩에 버터를 올린 벤치마크로 발열 제어 성능을 입증해 뜨거운 관심을 받은 바 있다.
김 CEO는 사람보다 아이디어에 권력과 권위가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는 "강한 회사는 큰 회사가 아니라 멤버 모두의 성공을 위한 최적의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는 조직"이라며 "사람이 아니라 좋은 아이디어가 통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표의 의견에 누구나 반박할 수 있고, 언제 어디서나 질문이 허용되는 이유다. 권위주의를 배척하는 건 "R&D는 최적화가 가장 중요한 영역인 만큼 학력·경력 등 모든 계급장을 떼고 아이디어로 승부해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