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조유진기자
추락하는 원화값을 방어하기 위한 외환당국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국민연금과 한국은행 간 외환스와프를 연장한 데 이어 수출기업들을 만나 '달러쌓기' 자제도 요청할 계획이다. 원화 약세에 베팅한 국내 주요 수출기업들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달러를 시장에서 환전하지 않고 보유하면서 달러 가뭄과 원화값 하락을 부추기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현재 환율 추세대로라면 올해 연평균 환율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 수준을 넘어설 전망이다.
16일 관계 부처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기재부가 주관하는 국내 주요 수출기업들과 간담회가 열릴 예정이다. 이형일 1차관이 주재한 간담회에는 국제금융국장을 비롯한 당국자들과 주요 수출기업 관계자들이 참석한다. 정부가 지난 1일 발표한 외환시장 안정화 종합대책에 따른 후속 조치로, 수출기업들의 환전·자금 운용 상황을 점검하기 위해 만든 자리다. 앞서 기재부는 삼성·SK·한화·HD현대 등 국내 주력 산업 수출기업의 환전 실적과 해외투자 내역 등을 제출받았다.
당국은 이들 수출기업이 취하는 '리딩 앤드 래깅' 전략이 외환 수급 불안을 심화시킨다고 보고 있다. 국내 주요 수출기업들은 환율 상승기에 해외에서 벌어들인 달러의 원화 환전을 늦추거나(래깅), 원자재 등 대금 결제에 필요한 달러를 미리 사들이는(리딩) 전략을 구사한다. 기업들의 이 같은 환 관리 기법은 시장에서 달러 가뭄을 부추기고, 환율 상승세가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기대심리를 끌어올리는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기업들의 달러 예금 잔액은 빠르게 늘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국내 5대 시중은행에 쌓여 있는 기업 명의의 달러 예금 잔액은 11월 말 기준 537억4000만달러로, 전달(443억달러) 대비 약 21% 급증하며 올해 최대 증가폭을 기록했다. 원화 약세 기대와 3500억달러의 대미투자금 확보 등으로 기업들이 달러 보유를 늘리면서 달러 예금 잔액이 빠르게 불어난 것이다.
당국은 달러 매도를 유도하기 위해 세제·정책금융 등과 연계한 인센티브를 확대하는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다. 해외 자회사 배당에 대한 익금불산입 비율을 현행 95%에서 100%로 상향해 해외에서 벌어들인 이익을 국내로 가져와 환전할 때 법인세 부담을 없애주는 방안이 대표적이다. 수출입은행·한국산업은행 등 정책자금 지원과 기업의 환전 실적을 연계하는 방안도 테이블에 올려놨다.
기재부는 지난 주말 사이 금융·외환 당국을 비롯해 보건복지부와 산업통상부까지 참여하는 관계 부처 합동 긴급 경제장관 간담회 여는 등 내외부 연쇄 회의를 하며 긴박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외환당국은 최근 환율 상승의 70%가 국민연금, 서학개미 등 해외투자 증가에 따른 수급 요인에 따른 것으로 보고 개입 강도를 높이고 있다.
전날 최지영 기재부 국제경제관리관(차관보)은 외환시장 큰손인 국민연금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헤지 없는 달러 투자를 경계해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국민연금은 이날 회의에서 650억달러 한도의 한은과의 외환스와프를 내년 말까지 연장하는 안건을 통과시켰다. 달러 매도를 통한 전략적 환헤지를 발동할 수 있는 근거 조항의 만료 기한도 내년까지 연장했다. 국민연금은 2022년 기재부 등의 요청으로 운용지침상에 전략적 환헤지 비율을 10%까지 상향할 수 있도록 하는 근거 조항을 만들어놨지만 아직까지 발동 사례가 공식적으로 확인된 적은 없다.
정부의 여러 조치에도 환율은 내려올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지난달 평균 환율은 주간거래 종가 기준 1460.44원으로,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 3월(1488.87원) 이후 월평균 최고치를 기록했다. 정부가 보는 환율의 심리적 방어선은 정권 출범 전 계엄 국면에 형성된 올해 연중 고점(1487원·4월8일)인 1480원대 후반 수준이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올해 연평균 환율은 1445원(15일 종가 기준) 안팎으로, 1998년(1394.97원)을 넘어 역대 최고 수준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된다.